커피

커피 세계사 2장 - 커피, 시작의 이야기

John Han 2022. 3. 15. 20:20

에티오피아 서남부에 진출

 

에티오피아 서남부 부족들이 언제부터 커피를 이용했는지 직접적인 답은 없다.

다만, 에티오피아 서남부에 대해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가 남김 자료다.

 

기독교도와 서남부 부족

 

1270년경에 편찬된 기록물 '케브라 나가스트'를 보면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에티오피아에 건너와 나라를 세웠다는 전설이 나온다. 

 

지금부터 2000년 전인 1세기경에 홍해에 면한 에티오피아 북부고지대에 악숨 이라는

왕국이 존재 했다. 이 나라가 기독교화된 것은 4세기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홍해는

페르시아 만과 함께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바다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다.

 

7세기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이슬람교가 부흥했는데, 615년 예언자 무하마드의 최초

신도들이 마카에서 박해받는 일이 발생했고, 이를 피해 도망쳐온 사람들을 악숨 왕국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9세기경 이슬람 상인 세력에 밀려 악숨 왕국은 그들에게 밀려 점차 내륙부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때 악숨 왕 데그나 장이 서남부의 에나리아까지 침략하기 시작했다.

에나리아는 20세기 초반에는 에티오피아를 대표하는 커피 산지였으며, 이것이 서남부 커피

자생지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교도와 서남부 부족

 

예언자 무함마드의 씨족인 쿠라이시족 족장의 아들 중 하나가 부하들을 이끌고

메카에서 홍해 연안 제이라로 건너간 것이 이슬람교도가 에티오피아로 향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들의 주요 목적은 '상업'이었다. 현지 족장의 허락을 받아 체류하면서 내륙부로 진출했고

9세기에는 기독교들과 함께 서남부에 안착하게 된다.

 

안착한 이슬람 상인들은 현지에서 그 수를 늘리면서 권력을 쥐시 시작했고 기독교도와 

이슬람 상인들의 손에 의해 에티오피아 서남부 루트가 개철되었다. 

 

'의학전범'에도 수록

 

에티오피아인이 예멘으로 건너갔음에도 커피를 전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당시 '세계 학문의 중심'이었던 페르시아 의학서에 

커피라고 추정되는 생약이 기록되기 시작했다. 

 

테헤란 근교 레이라는 마을에 알 라지 학자가 쓴 글들을 그의 제자들이 '의학집성'이라는

책으로 만들었다. 책의 내용에 따르면 '분 혹은 분카'라는 이름의 식물 열매와 그 열매를

끓여서 만든 '약'이 등장한다고 한다. '분'이라는 단어는 15세기 이후 아라비아어로 

커피 열매와 커피콩을 의미했다.

 

알 라지 이후 약 100년 뒤 페르시아의 이븐 시나 학자가 쓴 '의학전범'이 있다. 이 책의 '약'

해석에 '분큼 혹은 분코'라는, 예멘에서 보낸 식물 생약이 소개 된다. 이 역시 '분'과 같은 말로

커피콩을 가리킨다고 여겨진다. 

 

이 두 문헌이 나타난 시기와 에티오피아 서남부 사람들이 노예로 끌려간 시기 및 예멘에서 

그 수가 증가한 시기가 겹친다는 점은, 이 시기 아라비아 반도에 커피가 전해졌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근거 중 하나가 된다. 

 

400년 공백기 

 

10-11세기 때 커피 관련 기술을 겨우 찾을 수 있으나 이후 400년 넘도록 문헌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커피가 등장한 것은 15세기, 예멘에서다. 

 

예멘에서는 1021년 자비드를 수도로 하는 나자 왕조가 들어섰다. 그 중심은 에티오피아계

주민이었고, 인구는 많았지만 신분이 낮은 노예 출신들잉어서 이슬람에 관한 지식과 교양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로 인해 나자 왕조를 따르지 않는 부족도 많아서 작은 왕조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그들 간 다툼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잠시 평정의 때가 있었으나 다시 혼란의 시기가 왔을 때 라수르 가의 만수르 우말이 

예멘 독립을 기획 했고, 라수르 왕조 하의 예멘은 아덴을 교역항, 자비드를 학술종교도시로

하여 안정된 번영의 시대를 구가했다. 

 

한편 나자 왕조 멸망 후에도 자비드에는 다수의 에티오피아계 주민이 살면서 '아비드'라

불리는 일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라수르 왕조가 여러 개의 모스크와 학교를 세우면서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라수르 가문 왕족들은 이슬람 정통파 신학자와 법학자들을 아군으로 하여 자신들의 지배체제가

정당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했다. 

 

이렇게 라수르 왕조에는 학식 있는 사람들이 대접받았고, 아비드들은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로

밀려나게 되었다. 어쩌면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커피 공백기'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커피 '분 또는 분카'는 신분이 낮은 아비드들이 미개발 지역인 산악에서 가져왔다는 이유로 

자비드 학자들로부터 저속한 것으로 폄하된 것을 아닐까? 

 

'동방견문록'에서 말하는 에티오피아 정세

 

라수르 왕조 말기, 알 라지로부터 400년이 흘렀을 때 예멘에서 다시금 커피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조금 시간을 거슬러 이번에는 에티오피아의 역사 흐름을 훑어보고자 한다.

 

에티오피아 고지대의 기독교 국가 악숨 왕조는 11세기경 서남부족의 반격을 받으면서 기세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후 12세기경에 신하 부족이었던 아가우족 장군이 왕가를 치고 자그베 왕조라는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1270년 악숨 왕가의 최후 후손인 예쿠노 암라크가 쇼아 지방에서 봉기했다. 근린 이슬람교도의

힘을 등에 업은 그는 자그베 오아조를 물리친 후 쇼아 지방에 암하라족의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를 재건했다. 이것이 1975년까지 이어진 기독교도 국가, 솔로몬 왕조 에티오피아 제국의 시작이다.

 

한편 당시 에티오피아 홍해 연안부는 메카에서 건너온 쿠라이시족의 자손이 이슬람 지도자로서 현지의 

부족을 이끌며 새로운 씨족과 마을을 일으켰다. 1216년에 에티오피아 북동부 산지 하라를 제압하고

시크하르 씨족의 조상이 된 '하라의 수호성인' 피키 오마르가 대표이다. 

 

1185년에는 스스로를 술탄이라 칭한 쿠라이시족 우말 와라시마가 일족을 이끌고 제이라로 건너와

에티오피아 고지 입구에 위치한 이파트까지 일대를 장안한 뒤 이파트 술탄국을 세웠는데, 이로 인ㅇ해

기독교도들과 적대관계에 놓인다.

 

당시 에티오피아의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가 결정적으로 대립한 사건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에티오피아 제국의 제2대 솔로몬 1세는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순례를

위해서 적대관계인 이슬람 영토를 통과해야 했는데, 1288년 솔로몬 1세는 자신을 대신해 사제 한 명을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사제는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했지만 귀가하던 도중 하라에 있는 아달의 마을에서 이슬람교도들에게 붙잡혔다.

이교도의 손에 할례 당하는 굴욕을 겪고 풀러난 사제로 인해 솔로몬 1세는 즉시 아달을 공격하고 승리를 한다.

이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십자가의 종, 암다 시욘

 

이 사건 이후 솔로몬 왕조 에티오피아 제국은 이교도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데, 솔로몬 1세의 조카뻘인

제9대 황제 암다 시욘 1세가 대표적이다.

 

그는 스스로를 '십자가의 종'이라 칭하며 이교도들과 전쟁에 몰두하는데, 그 절정이 1316년 서남부 다모트로 침공이었다.

큰 승리 후 이슬람 상인과의 노예 매매로 부를 축적하고 있던 하디야 마을로 눈을 돌린다. 그곳 마을 오아을 비롯해 

주민 대부분을 학살해버렸다. 

 

암다 시욘은 에티오피아 북부까지 토벌에 나섰다가, 카이로에 보냈던 사절이 귀국하던 도중 이파트 술탄국에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이파트로 방향을 돌린다. 역시나 이파트 술탄국을 제압하고 속국화 한다.

 

한편 와라시마 가문 사람들은 여러 대에 걸쳐 솔로몬 왕조에 반역을 기획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1410년 와라시마 가의 최후 술탄 사아닷딘 2세가 반란에 실패한 뒤 도주한 제이라에서 

살해당하며 이파트 술탄국은 멸망했다. 

 

이때 사아닷딘의 자녀 열 명이 예멘으로 도망갔는데, 5년 후 그 중 한 명이 돌아와 아달 술탄국을 세웠다.

 

언뜻 커피와 아무 관계가 없는 역사가 계속된 듯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 커피의 기원이라 여겨지는 

중요한 힌트가 담겨 있다. 14-15세기에 걸쳐 에티오피아 서남부에서 이파트를 거쳐 홍해 연안부,

예멘에 도달하기까지 비교적 거대한 사람들의 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이 움직임 이후 15세기 예멘에서 커피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열쇠를 쥔 하라

 

이때 분쟁에서 도망쳐 살아남았던 사람들이 커피 전파에 관여했는지 직접적인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현재 에티오피아 커피나무의 식물학적 분포에서 한 가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하라의 커피이다.

 

하라는 에티오피아를 대표하는 커피 산지 중 하나이면서, 예외적 특징이 많은 이채로운 지역이다.

에티오피아의 주요 커피 산지는 서남부에 집중되어 있는데 하라만이 동부에 해당하는 홍해 연안에 위치한다.

 

또한 서남부에서는 숲속에서 자생하는 나무에서 커피 열매를 채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데 반해,

하라는 '커피 재배가 시작된 땅'으로 불리면서 오래 전부터 인위적인 재배가 이루어졌다. 

 

그렇게 오래된 산지임에도 하라의 커피가 유명해진 것은 20세기 초, 에티오피아 제국이 적극적으로

커피를 수출하게 되면서였다. 

 

그떄까지 에티오피아의 커피는 예멘으로 모인 뒤, 모두 다 '모카'라는 이름으로 수출 되었다. 지금도 볼 수

있는 '예멘 모카' '에티오피아 모카' '모카 하라' 등의 이름은 이러한 역사 배경에서 나왔다. 

 

1950년대 미국과 유럽의 커피나무 조사팀이 서남부에서 다수의 에티오피아 야생종을 발견했는데,

그들 중 하라의 나무들과 유사한 특징을 지닌 한 그루의 커피나무가 있었다. 

 

'월키테'라고 불리는 이 야생종이 하라에서 재배된 커피의 직접 조상이라고 추정되는데, 그 나무 

발견 장소부터 남동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암다 시욘에 의해 주민학살이 일어났던

마을 하디야가 있다. 

 

역사적 사건으로 인한 사람의 이동과 식물학적 분포라는 두 가지 측면을 놓고 볼 때, 14세기에 일어난

에티오피아 서남부에서의 충돌에 의해 하디야에서 홍해 연안부로 도망쳐 살아남은 사람들이 커피나무를

생육 가능한 고지대 하라에서 재배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의 예멘 커피는 크게 내 종류로 구분되는데 자비드 북쪽 부라산 주변의 품종이 가늘고 긴 콩으로,

하라에서 유래하는 품종이라고 알려져 있다. 

 

예멘 커피의 품종의 특징을 보면 커피나무는 여러 차례, 에티오피아에서 홍해를 건너 예멘으로 

건너간 듯하다. 어쩌면 9-10세기 악숨 왕국에 잡혀 있던 에나리아 사람들이 전한 커피나무의

자손이 둥근 콩을 맺는 우다이니와 다와이리를, 그리고 14세기에 하디야 부근에서 하라를 거쳐

예멘으로 건너온 것의 자손이 가늘고 긴 콩을 맺는 브라이는 아닐까 추정된다.

 

예멘의 카와

 

15세기가 되면, 드디어 커피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바로 예멘에서 확산된 '카와'라는

음료다. 16세기 이집트의 이슬람 법학자 압둘 카딜이 '커피 합법성의 옹호'라는 저서에서 실제로 현지에서

마시는 것을 목격했다는 노인의 증언까지 담고 있다.

 

카와는 14-15세기 에티오피아 홍해 연안부에서 예멘에 도래했지만 처음에는 커피 이외의 재료로 만들어졌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이슬람교 법도의 백포도주를 포함해 여러 음료를 '카와'라고 불렀던 것 같다.

 

이후 15세기에 접어들어 예멘의 아덴에서 커피로 만드는 카와가 발명되었다. '커피나무와 캇은 둘 다 

에티오피아 발상이되, 커피 카와는 예멘이 발상지'라는 것이다.

 

예멘에 카와를 전한 사람은 '수피 알리 이븐 우말 아 샤즈리' 이다. 술탄 사아닷딘 2세의 딸과 결혼한 후

당시에는 아직 빈촌이었던 모카로 이주해 사람들에게 포교했다. 

 

이 때문에 '모카의 수호성인' 또는 '커피 농가, 찻집 주인,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서 모셔지게

되었으며, 교단 활동이 활발했던 알제리아에서는 커피를 '샤즈리아'라 부른다고 한다. 

 

샤즈리가 확산시킨 캇의 잎에는 '카치논'이라는, 각성제와 비슷한 성분이 들어 있어서 각성과 식욕 억제,

행복감, 도취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캇의 생잎은 보존이 어렵고 신선도가 떨어지면 성분도 없어져버리는

결점이 있었다. 그것이 '커피 카와가 생겨난 계기로 작용했다.

 

카와에서 커피로 

 

캇을 이용한 카와는 15세기 초 모카에서 예멘 각지 수피들에게 퍼져갔다. 커피처럼 고지대에서만 자라고

신선도가 중요한 캇을 예멘의 산속에서 재배했다. 

 

하지만 산에서 멀리 떨어진 항구마을 아덴은 신선한 캇을 손에 넣기가 어려웠다. 아덴 수피들은 무하마드 자말딘

아 자부하니에게 캇 대신 사용할 대체재를 상담했다. 

 

자부하니는 아잠의 땅 사람들이 여러 식물로 카와를 만들어 마셨으며 커피의 붉은 열매를 사용했던 것을 떠올렸다.

커피 열매의 경우, 말려서 건조하면 장기간 보존이 가능하며 산에서 운반하기도 용이했다. 그는 '커피 열매와 종자에도

캇과 같은 성분이 있으므로 그것으로 카와를 만들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분 카와와 기실 카와

 

'커피 카와'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그 중 어느 것도 현재 커피와는 다르다.

열매를 건조하면 파치멘트와 과육이 붙어버린 상태의 '껍질'이 만들어지는데, 

당시 에멘에서 사용한 방법 중 하나는 그 껍질 부분만을 끓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커피콩이 들어 있는 열매를 통째로 구워서 끓여내는 것이다.

 

전자는 '기실(껍질) 카와'로 '키시리아', 후자는 '분(커피 열매) 카와'로 '분니아'라고 불린다.

예멘에는 지금도 '기실 카와'와 '분 카와'가 남아 있다. 그러나 현대의 '분'은 콩만을 사용하는

아라비아식 커피로, 오래된 기록에서 전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