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전문점의 탄생
자부하니가 발명한 커피 카와는 장기간 보존과 수송에 용이했다. 그래서 예멘 전역에 알려지고
이슬람권 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1470~1495년에는 이슬람 성지 메카와 메디나의 예멘인
거주지구에서 커피 카와가 음용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로 퍼져나갔다.
졸음 방지를 위해 마셨음은 물론 이슬람 학교 학자와 학생 그리고 일반 시민까지 학업과 업무
능률 향상을 위해, 또는 단순한 기호식품으로서 커피를 이용했다.
1500년 경에는 '카페하네(커피하우스라는 뜻)' 즉 커피를 마시는 전문점이 메카에 생겨났었다.
알코올을 지금지하는 이슬람 사회에서 카페하네는 커피를 마시는 동시에 시민이 교류하는 마당으로 발전했다.
다만 카페하네는 남성만 드나드는 곳이었는데, 카페하네를 모델로 하는 영국의 커피하우스에서도 이러한
룰이 있었다.
오스만 제국으로 전파
당시 또 하나의 이슬람 대국 오스만 제국에도 16세기에 커피가 전해져다. 이스탄불에는 1517년 오스만 제국
황제 세림 1세가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직접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맘루크 왕조와 오스만 제국의 전쟁은 당시 유일한 커피 산지였던 예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결과적으로
맘루크 왕조가 세림 1세에게 패하고 오스만 제국에 복종하면서 1517년 예멘의 대부분은 오스만 제국에
편입돼 구 맘루크 왕조의 사관이 다스리는 땅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에 의해 직접 재배가 이루어진 커피는 더 널리 보급되었다. 커피는 많은 이슬람교도에게 사랑받으면서,
예멘의 중요한 특산품으로 자리잡았다. 그러자 오스만 제국은 1544년경부터 캇 재배를 제한했고, 대신 커피나무
재배를 장려했다(외화 획득 수단).
수확한 커피 열매는 분과 기실이 되어 자비드 북방 내륙부 바이트 알 파키프라는 지역과 모카 또는 아덴의 항구에서
팔려 나갔다.
오스만 제국 수도 이스탄불에서 커피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1554년, 두 명의 시리아인 하킴과 샴스가
카페하네를 오픈한 것이 그 계기라고 한다.
16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이 전성기를 맞은 이면에는 신분과 사회제도에 대한 불만에서 오는 염세관이나
정치부패에 의한 허탈감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현실에 절망한 사람들이 자연스레 수피즘으로 빠졌고, 커피와 카페하네가 덩달아 유행했다.
원통형 수동 배전기와 커피그라인더 등 커피 전용기구도 이 시대 이스탄불에서 고안된 것으로,
이후 커피 문화와 기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커피 반대운동이 일어난 이유
순조롭게 보급되었을 것 같은 커피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1511년 메카 시장감찰관 하일 베그가 커피 판매와 음용을 금지한 '메카 사건'을 시작으로,
1534년 카이로 반대파에 의한 카페하네 습격이 일어났다. 이스탄불에서도 정통파 학자들이
카페와 커피를 비판했다.
전통을 중시하는 수니파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커피는 '관행으로부터의 일탈이다' '정신에 작용하기 때문에
술과 같다'는 비판이 여러 차례 제기 됐었다. 그러다 16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커피는 여러 학자들로부터
이슬람법에 비추어 합법적인 음료라고 지지를 받는다.
그런데 이러한 커피 반대운동 이면에는 정치, 상업적인 동기가 크게 작용했다. 특정 위정자가 문제시한 것은
커피보다 오히려 카페하네라는 존재였다. 그곳에서 음주와 음악 등 금지 행위를 하는 자들이 많고, 소문부터
정치공작까지 갖가지 이야기가 오가는 교류의 장이 되면서 감시와 제제의 대상이 된 것이다.
유럽으로 이어지는 네 개의 길
이 시대, 이슬람 세계와 유럽을 연결하던 주요 루트는 지중해였다.
대항해 시대를 이끈 스페인과 포르투갈 이외의 유럽인에게는 지중해가
유일한 '바깥세계로의 관문'이었다.
1573년에 레반트를 여행한 독일 의사이자 식물학자 레온할트 라우발프는 사람들이 '차우베'라는
음료를 마시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동방여행실록'에 소개했다.
식물로서 커피나무에 대해서는 1580년 이집트에 도항한 이탈리아 의사이자 식물학자 프로스페로 알파니가
'이집트 식물'에 기록한 것이 최초이다.
지중해는 유럽인에게 '커피를 알린' 최초의 입구이자 '실제로 커피가 들어온' 최초의 입구 역할도 했다.
당시 유럽 쪽 현관문은 베네치아였다(그리스나 발칸 반도도 오스만 제국령이었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세기 말에 이미 베네치아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고있었다고 한다.
영국과 프랑스에도 지중해를 경유해 커피가 전해졌다. 혈액순환설을 발표한 해부학자 윌리엄 하베이가
베네치아 인근 파도바 대학에서 처음 커피 맛을 알게 되었고, 1627년에 런던으로 돌여와 마셨다고 전해진다.
프랑스에서는 1644년 마르세이유 상인 비엘 드 라 로크가 커피를 들여왔지만, 마르세이유 너머로 전파되지는 않았다.
이처럼 맨 처음 개인이 소량 들여와 마시기 시작하던 커피는 이후 영국 레반트회사 등 동방교역을 담당하던
상인들이 상품으로 취급하면서 널리 퍼졌다.
동인도회사 루트
16세기 후반 영국과 네덜란드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뒤를 이어 해양진출에 성공하고, 17세기로 들어서면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곧바로 홍해 입구인 예멘의 항구, 아덴과 모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1616년 모카 항구에 들른
네덜란드 직물상 피터 판 덴 부르크는 거기서 커피콩을 입수해 기념품으로 본국에 가져갔다. 이때 가져간 콩이
암스테르담에서 발아해 유럽 땅에 뿌리를 내린 최초의 커피나무가 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현지에 상관까지 세웠는데 최초의 장소가 바로 아덴이었다. 그러다 1620년 아덴 부근에서
내란이 발발하자 이 네덜란드 상관은 모카로 이전하게 된다.
모카는 본래 오스만 제국 중심지로 향하는 홍해 교역의 거점 항구였지만, 라시드 왕조가 지배한 후 오스만 제국과
교역이 어려워지자 인도양을 통한 유럽과 아시아 간 거래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이렇게 하여 모카는 유럽으로 커피가
수출되는 항구로 자리를 굳힌다.
하지만 처음에는 유럽에서 커피를 구매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지중해를 경유해 영국에 알려지고 이를 통해
커피하우스가 유행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1640년 암스테르담의 상인이 발주한 커피를 모카에서 배편으로 보낸 것을 시작으로 조금씩 커피 수요가
늘어 1663년부터는 정기적으로 커피 수출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17세기 후반부터 모카는 커피마을로 번영했고,
'모카'라는 이름이 커피의 대명사로서 유럽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파리 루트
어느 터키인이 커피를 들고 가면서 파리 사람들이 커피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 대사
솔리만 아가였다. 그는 파리에서 빌린 집을 터키 풍으로 장식한 뒤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누구든, 커피를 내어주며 접대했다.
이로 인해 순식간에 파리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귀족이든 서민이든 너나할 것 없이 그를 찾아가 커피를 얻어 마셨다.
17세기의 프랑스는 부르봉 왕가 통치 아래 정치, 문화적으로 급성장하며 대국의 자리를 굳혀갔는데, 수도 파리는 문화와
유행의 중심지가 되고, 사람들은 기호품과 사치품에 한층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실은 커피가 마르세이유를 통해 전해졌지만 그것은 지중해 주변 서민이 카페하네에서 마시는 스타일일 뿐이었다.
당시 파리 시민 대부분은 커피를 '촌동네 사람들이나 음료' 따위로 여겼다.
그런데 솔리만 아가가 대접한 오스만 궁정식 커피는 기존의 이미지를 순식간에 바꾸어놓았다. '아라비안나이트' 세계에서
넘어온 듯 호화로운 예법과 귀한 중국제 자기에 담아 하인들이 가져다주는 설탕 넣은 커피는 서양인들이 하찮게 보면서도
동경했던 오스만 제국의 문화 자체였다.
당시 솔리만에게 커피를 얻어 마시는 일은 유행에 민감한 '파리지앵' 사이에서 일종의 상징처럼 여겨졌다고 한다.
빈 루트
오스만 제국은 유럽 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야망을 품고 오스트리아로 여러차례 진군을 시도하는 데
1683년 빈까지 들어갔지만, 2개월 후 구원에 나선 폴란드, 오스트리아, 독일 연합군 앞에 오스만 군은
무릎을 꿇으며 전쟁은 끝난다.
이 전쟁과 관련해 폴란드 출신 병사 콜시츠키의 에피스도가 있다. 그는 터키인으로 변장해 포위된 빈에서
탈출한 뒤 구원군에게 적진의 정보를 전한다. 이 공적으로 금과 집, 그리고 패배한 오스만 병사들이 남긴
대량의 커피를 받은 콜시츠키가 빈 최초로 카페 '파란 병 아래 집'을 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후세에 창작된 이야기이며, 빈 최초의 카페는 콜시츠키보다 먼저 아르메니아인 요하네스
디오다트가 오픈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빈 카페에서는 지금도 콜시츠키의 공적을 찬양하고, 그의 초상화를 장식한 카페가 많다.
'파란 병 아래 집'은 그가 사망한 후 없어졌지만 이 일화에서 이름을 딴 곳이 있으니, 바로 미국의 '블루 보틀'이다.
현재의 커피는 언제 시작되었나?
예멘에서 태어난 '커피 카와'에는 분과 기실 두 종류가 있으며, 어느 쪽도 우리가 지금 마시는 커피와는 다르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15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이슬람권에서 확산되었던 것도 분과 기실이다.
한편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전반 무렵 레반트와 이스탄불에서 유럽인이 목격한 것은 분.
따라서 유럽에는 지금처럼 커피콩만 이용한 형태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유추할 수있는 가능성은 세 가지 정도 있다.
하나는, 분과 기실의 이용 구분이다. 원래 기실은 더운 지역에서, 분은 추운 지역에서 마시기에 적합하다는
이슬람 의학에 근거한 개념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북상하면서 분을 이용하는 빈도가
증가했을 수 있다.
두 번째, 커피금지령 때 선택되었을 가능성이다. 현재 예멘에서 마시는 기실에는 건조 중 과육이 발효되어
나타나는 알코올 같은 것이 있다. 각기 커피금지령 관련 문헌에 종종 '기실이 태워 버려졌다'라는 기록은
남아 있는 반면, 분이 태워졌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마지막 하나는, 모카의 대두이다. 기실과 분 둘 다 있는 이슬람권은 바이트 알 파키프에서 커피를 산 반면,
유럽은 모카에서 온 커피가 주류였다. 즉 모카에서 수출된 커피콩은 껍질이 벗겨져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당시 모카에서는 '재배를 독점하기 위해 발아 능력을 상실한 콩을 수출했다'고 전해진다. 이를 위한 사전 처리였는지
아니면 오랜 운송 과정에서 곰팡이, 쥐, 벌레의 해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런 요인들이
모카에서 유럽으로 수출되는 커피 형태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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