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커피세계사 4장 - 커피하우스와 카페 시대

John Han 2022. 3. 18. 12:26

커피 선진국 : 영국

 

지금은 '홍차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강한 영국이지만 17세기 영국은 홍차가 아닌 '커피의 나라'였다. 

유럽에서 최초로 커피하우스 유행을 맞은, 유럽 커피 소비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커피 선진국이었다.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은 1652년 아르메니아 출신 파스카 로제가 런던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오픈한

이후부터다. 그때부터 폭발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고, 30년이 지났을 때 인구 50만 명의 런던에

3,000개의 커피하우스가 들어섰다.

 

이러한 이유는 1649년에 발발한 청교도 혁명으로 시민이 지지하는 의회파가 왕당파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영국은 시민사회의 여명기를 맞이했다.

 

왕후귀족들이 궁정과 살롱을 사교장으로 이용했듯 시민에게도 정치 의견을 교환하고

수다를 떨 '교류의 장'이 필요했으니, 그 무대가 바로 커피하우스였던 것이다. 

 

그 후 왕정복고 시대가 되어서도 커피하우스의 인기는 멈추지 않았고, 명예혁명을 

거쳐 영국이 근데 시민사회로 탈바꿈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커피는 출생률을 떨어뜨린다

 

영국 커피하우스는 이슬람권의 카페하네를 모델로 했으므로 초기에는 술을 팔지 않았다.

커피하우스 등장 이전까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는 술집이나 숙소 등 술을 마시는 곳밖에

없었다. 그런데 커피를 마시면 마실수록 카페인 때문에 머리가 개운해지고 토론에 집중할 수

있게 되면서 소비를 많이 하게 되었다. 

 

덩달아 커피는 근면과 성실을 중시하는 시민의 음료라는 이미지로 자리매김하면서

프로테스탄트 국가 청교도들이 즐겨 마셨다고 한다.

 

그렇다고 커피와 커피하우스가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손님을 빼앗긴 술집은 물론이거니와 런던대화재 후에는 배전 중 화재를

두려워한 출판상, 그리고 의외라고 여겨질 수 있지만 많은 여성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당시 커피하우스는 여자 출입금지였기 때문에 커피하우스에 심취한 남편들이 밖으로만

나돌자 성난 부인들이 '커피는 출생률을 떨어뜨린다'라는 팸플릿을 발행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커피하우스 내에서 이루어지는 시민토론을 탐탁지 않아 하던 국왕 찰스 2세가 여성들의

불만에 편승해 커피하우스 폐쇄령을 발표했지만 시민들이 강력 반발하면서 10일 만에 철회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시민사회의 요람'이었던 커피하우스는 시민사회가 완성되면서 제 역할을 마쳤고,

수요도 점차 상실했다. 커피하우스들은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거나 알코올을

제공하는 업소로 변모했다.

 

또한 17세기 후반 가격이 안정된 차를 과잉 매입해버린 영국 정부는 홍차 소비를

촉진하기 위한 방편으로 커피에 제동을 걸었다. 이 정책이 성과를 거둬 영국의 홍차

소비량은 매년 증가하고 커피 소비는 감소하기 시작했다. 

 

영국 커피하우스 풍경

 

당시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처음 오는 사람이든 단골이든, 귀족이든 천민이든

차별 없이 출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안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대화에도 참여가

가능했다. 

 

입장료를 선불로 받고 커피는 카운터에 있는 주인에게 수시로 부탁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는데 입장료 1페니, 커피 한 잔 2페니 정도로 저렴했다. 1페니 지불하면

대학처럼 무엇이든 배울 수 있다는 평판이 나며 '페니 유니버시티'라고 불리기도 했다.

 

격조 있는 스타일에 빠지다 : 프랑스

 

프랑스는 영국보다 늦게 출발했지만 카페 인기는 오래 지속되었고 커피 소비도 안정적으로

증가했다. 소비를 주도한 사람들은 파리의 중산층 시민계급이었는데, 파리지앵들은 보통의

프랑스 사람들보다 평균 10배 더 마셨다. 

 

솔리만 아가의 방문 이후 커피는 궁정과 살롱에서 귀족들이 자주 마시는 음료로 자리매김했고,

파리 거리에도 커피를 파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파리에 최초로 들어선 카페는 1672년 아르메니아인 파스칼이 생제르맹 시장에서 오픈한

오리엔탈 커피점이다. 그러나 '파리 카페의 원점'이라고 일컬어지는 '카페 프로코프'가 

등장하면서 열광적인 카페 시대가 만개한다. 

 

1686년에 개업한 카페 프로코프는 거대한 대리석 테이블에 샹들리에와 거울을 비치하고

호화로운 베르사이유 분위기의 실내장시으로 이목을 끌었다. 그리고 커피와 리큐르, 아이스크림을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했다.

 

이곳에 부유층 및 중산층이 주류였지만, 귀족과 지식인, 코미디언, 프랑세즈 배우들 등 다채로운

사람들이 프로코프를 찾았다. 18세기 당시 최고의 지성으로 칭송받던 볼테르를 비롯해 디드로, 다랑베르,

루소 등이 모여 '백과전서' 편집회의를 한 곳도 카페 프로코프였다.

 

프로코프와 인기를 양분한 곳이 '카페 드 라 레장스'였다. 레장스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체스 찻집'이었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지적 유희로서 체스가 크게 유행했는데, 카페에서도 손님들끼리 체스를 두거나

이를 구경하는 풍경이 일상적이었고, 그 중심지는 바로 레장스였다. 

 

18세기 초에는 인구 50만명 파리에 300개의 카페가 들어섰으며, 프랑스혁명 직전인

1788년에는 인구 60만 명 도시에 1,800개로 증가했다. 

 

18세기 중반에는 기존의 터키 방식으로 마시는 것에서 벗어나 뜨러운 물에 커피가루를

담갔다가 빼는 침출법이 새로 개발돼 널리 퍼졌다. 

 

1763년에는 돈 말탄이라는 인물이 도기로 만든 포트 안쪽에 플란넬 여과봉지를 걸치는 추출기구를

발명했다. 현재 드립식의 원형이라고 불리는 발명품이지만 커피가루 대부분이 물속에 잠기기 때문에

지금의 드립식보다는 프렌치프레스에 가깝다. 

 

프랑스혁명은 카페에서 시작되었다

 

18세기 프랑스 최대 사건은 '프랑스혁명'이다. 이 혁명에도 카페가 지대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는 다른 유럽 제국들과 달리 절대왕정 체재를 고수 했고, 이런 상황에서 토론의 장인

카페에서 볼테르와 루소 등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비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또한 왕위를 노리며 부르봉 왕가와 대립했던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2세는 부친으로부터

물려 받은 팔레 루아얄의 중정의 회랑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카페를 포함한 쇼핑몰을 만들었다.

 

이곳은 일반 시민에 개방되었지만 유일하게 출입 금지된 부류가 있으니 국가 권력 즉 경관이었다.

이 때문에 정부에 쫓기는 혁명가와 사상가, 범죄자와 창녀까지 모여들면서 파리에서 가장 활기찬

장소가 되었다.

 

수수께끼투성이 최대 소비국 : 네덜란드

 

당시 최대 커피 소비국은 바로 네덜란드였다. 해상로를 이용해 커피 수입과 재배에 가장

먼저 착수한 나라였다. 18세기에는 동인도 항로인 모카, 자바, 레위니옹, 서인도 항로인 아이티,

마르티니크, 수리남을 통해 세계의 커피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모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네덜란드인이 어떤 방식으로 커피를 마셨는지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어서,

소비 실태는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1700년경에 인구 20만 명인 암스테르담에 영국, 프랑스에 비해 아주 적은 32개의 카페가 있었고

카페와 관련해 화려한 이야기들도 전해지지 않으니, 어쩌면 가정, 직장의 소비가  주류였는지도 모른다.

 

여성들이 사적 공간에서 만나서 마시다 : 독일

 

독일에 커피가 전해진 것은 1670년이다. 유럽의 다른 나라의 경우와 달리 독일에서는 '여성들이 사적

공간에서 내려 먹는 음료'로 보급되었다. 

 

당시 독일 여성들 사이에서 얼마나 인기를 누렸는지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가 바흐의 오페라 '커피 칸타타'이다.

 

18세기 후반 들어 커피 소비가 계속 증가하자 국가 자본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우려한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는

소비 억제 책을 연달아 내놓았다. 

 

지정업자 외에는 배전을 금지하고 수입을 규제하는가 하면, 1777년에는 커피금지령을 선포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독일은 치커리와 대맥 등으로 만드는 대용 커피가 개발돼 서민들에게 확산되었다.

금지령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1780년 이후 독일은 프랑스를 능가할 정도의 커피 소비국으로 성장하였다.

 

당구, 신문, 크루와상과 함께 : 오스트리아

 

1683년 오스만 군에 의한 제2차 빈 포위전 이후 카페가 들어서며 시민의 사교장으로 확대되었다.

프랑스 카페에 체스가 있는 것처럼 빈 카페에는 당구대와 신문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카페 메뉴에 등장한 것이 크루아상이다. 초승달 모양의 빵은 오스만 군을 격퇴한 

기념으로 그들의 깃발 문양이었던 초승달을 모티프로 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빈의 카페 숫자가 점차 늘어났지만, 나폴레옹 전쟁을 치르면서 격감했고, 다시 카페 전성기가 부활한 것은

전쟁 종결 후 도래한 비더마이어 시대부터다.

 

커피하우스, 공민관 역할을 하다 : 미국

 

커피가 처음 미국에 전해진 시기 및 경위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1668년 뉴욕에서 

커피를 마셨다는 것이다. 

 

커피는 1670년경 뉴잉글랜드에도 전해지고, 바로 그곳에 미국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생겨났다. 

당시 미국에서는 퍼블릭하우스(영국의 펍)와 커피하우스, 선술집(태번), 숙소(인)의 개념이 혼용되었다.

 

이름은 커피하우스이지만 명확한 구별이 없었기 때문에 태번이자 펍의 형태가 섞여 있었다. 

 

어찌됐든 커피, 술, 식사 등을 제공하고 주민 간 교류와 상담의 장으로, 지역행사를 위한 '공민관'

역할까지 겸하는 공공장소였다. 

 

보스턴 차 사건을 계기로 

 

18세기 후반이 되면서 식민지 미국과 본국 영국 간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미국 남부는 여전히 영국과 

경제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영국은 미 남부에서 생산한 면화로 제품을 만들어 다른 나라에도

판매하는 식으로 공생하는 관계였다. 

 

반면 공업화가 진행되던 미국 북부 자본가들은 호시탐탐 남부의 시장을 욕심내고 있었다.

당연히 남부와 영국 간 오래된 관계에 불만이 쌓였고, 이 불만은 한순간 폭발했다. 

 

1773년 영국이 자국의 동인도회사에만 무관세 홍차 판매를 인정하는 조례를 선포하자 

미국 급진파들이 영국 동인도회사 선박을 습격해 쌓여 있던 차를 바다에 빠뜨려버린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영국과의 대립은 북아메리카 사람들의 음료가 차에서 커피로 대체되는 계기로 

작용하면서 커피 소비 증가로 이어졌다. 

 

특히 사건이 일어난 보스턴에서는 홍차를 대신해 옅은 커피가 보급되었고, 미국 내에서도

특히 보스턴은 '약배전'을 대표하는 지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