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커피 인문학 3장

John Han 2022. 3. 30. 13:48

커피, 문화를 만들다

 

커피, 와인, 스페셜티 커피

 

처음에 커피는 약이었다. 에티오피아 부족들은 커피나무 잎을 씹거나 줄기 끓인 물을 마시며 힘이 생기는 효과를 누렸다. 7-8세기 홍해를 건너 커피가 전해졌을 때는 무슬림 사이에서 졸지 않고 밤새 기도할 수 있게 해주는 각성제로 애용되었다.

 

17세기 초 유럽 땅을 밟은 뒤 더 빨리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 이유가 카페인 때문인지를 안건 함참 뒤였다. 계속해서 커피 소비량이 늘어난 이유는 맛이다. 와인처럼 향미로 즐기는 음료로 커피를 즐기는 것이다.

 

와인이 지닌 맛의 가치를 처음 알아본 이는 프랑스 보르도 사람들이다. 관리와 노력으로 포도밭을 일궈 보르도 와인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 재배자들의 신념과 철학을 통해 와인 애호가들이 와인을 사이에 두고 주고받는 이야기는 더 풍성해질 수 있었다. 

 

세계 곳곳의 와인 마니아들은 프랑스 와인을 '테루아 와인'이라 부르며 신뢰 했고,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은 프랑스 와인을 즐겨 찾았다. 프랑스 스가 와인의 품질을 성공적으로 관리하자 산지, 품종, 재배법, 품질에 따라 면밀히 따져 따로 병에 담아내는 '테루아 와인'의 시대가 열렸다.

 

와인 애호가들이 까다롭게 맛을 따지는 데는 3가지 의미가 있따. 첫째, 자연이 빚어내는 향미를 즐기는 행복감이다. 둘째, 혼신을 다해 자연이 부여한 포도의 특성을 최대한 이끌어내 표현하려는 재배자에 대한 경의의 표시다. 셋째, 나쁜 와인은 건강에 해롭기 때문이다. 

 

커피도 와인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커피의 향미를 따지며 마시는 문화는 와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와인의 시작이 보르도 였다면 커피는 미국에서 처음 언급된 '스페셜티 커피'에서 시작 된다. 에르나 크누첸은 커피 산지까지 찾아가 생두를 구매해오는 직거래와 제값을 치러 재배자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는 공정무역을 전파한 주역이다.

 

그는 '좋은 향미를 지닌 스페셜티 커피란 특별한 미세 기후를 갖춘 곳에서 자라 최상의 향미를 지닌 커피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커피 역사 1970년대 - 로부스타에서 아라비카 생두로 - 스타벅스의 초기 신념과 변질  - 산지 특성을 반영한 테루아 커피에서 표준화 된 맛으로)

 

스타벅스 출범 초기 1976년 와인계에서는 '파리의 심판'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상표를 가리고 맛으로만 우수성을 겨루는 블라인드 테이스팅 에서 미국의 캘리포니아 와인들이 보르도의 테루아 와인들을 제치고 각 분야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세계 최고의 와인이나 최상의 커피는 정해진 곳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저마다 자란 땅과 기후, 재배자의 열정을 올바로 담아낸다면 배타적인 최고 존엄의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에르나 크누첸은 1978년 프랑스에서 열린 커피국제회의에서 스페셜티 커피 시대의 개막을 선언했고, 많은 지지를 받으며 미국 스페셜티커피협회와 유럽스페셜티커피협회를 조직하고 커핑을 통해 스페셜티 커피를 판별하는 기준을 만들었다. 

 

한편 스타벅스는 커피 맛 표준화를 무기로 매장을 늘려 나갔고, 커피 애호가들은 스페셜티 커피의 정신을 호소하며 '반 스타벅스' 전선을 구축했다. 커피의 향미를 존중하는 움직임은 산지로까지 번져 1999년 브라질에서는 엄격한 심사를 거쳐 최고의 커피임을 입증하는 '컵 오브 엑설런스'를 시행한다. 

 

인스턴트커피 혁명

 

2,000년 커피 역사에 국가마다 기여한 바가 있다. 그중 인스턴트 커피는 20세기에 미국에 의해 등장한다. 인스턴트커피의 확산은 인류 문명사에서 '제1의 물결'이라 불린다. 미국의 커피 대중화가 유럽 국가에 비해 많이 늦었지만 그럼에도 커피를 마시는 '신속함'과 '간편함' 때문에 인스턴트커피가 탄생했다. 

 

동부에서 서부로 개척해나가는 카우보이들은 각성과 활력 등 커피의 힘을 빌리는 경우가 잦아졌고, 인디언들과 수시로 전투를 치러야 하는 민병대에도 커피는 매우 요긴했다. '카우보이 커피'는 19세기 초 미국의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추출법인데, 코펠과 같은 냄비에 물과 커피가루를 함께 넣고 끓여내 마신 방식이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한 게 '양말 커피'다. 커피가루를 담은 천주머니를 물에 넣어 끓이는 대신 뜨거운 물을 흘려보내 향미를 드높인 방식이다. 커피의 위력은 남북전쟁에서 더욱 드러난다. 

 

북군을 이끈 링컨 대통령은 남군 지역의 항구를 봉쇄해 남군은 전쟁 내내 커피를 공급받지 못했다. 담배 생산지를 끼고 있던 남군은 휴전이 이어질 때면 담배와 커피를 맞바꾸자고 북군에 매달리기도 했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 '전쟁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 재빨리 끓여 마실 수 있는 커피'를 화두로 풀어낸 게 인스턴트커피다. 1901년 뉴욕 버펄로에서 열린 '범비국박람회'에서 일본계 미국인 과학자 사토리 가토는 인스턴트커피를 처음 선보였다. 그는 물에 녹아내리는 성분만 가려내 커피를 추출한 뒤 물만 날려 보내는 방식으로 가용성 가루만 정제해냈다. 

 

사토리 가토가 특허를 내지 않는 사이 조이 워싱턴이 기술특허를 받고 맛을 보완시켜 1차 세계대전 때 4년간 지속적인 미군 보급품으로 제공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반 소비자를 겨냥한 상품을 만들었다. 알루미늄 튜브에 인스턴트커피를 담은 고급형 브랜드를 만들었지만, 당시 세계 대공황 상황에서 잘 팔리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퍼져나간 시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간 군인들을 통해 세계 곳곳에 소개되었다. 

 

커피와 식민지

 

세계 각지로 뻗어간 커피밭은 노예 착취의 결과물이었다. 권력자들은 다른 나라를 침략해 재산과 노동력을 강탈함으로써 세력을 빠르게 불려나갔다. 전쟁 포로와 식민지인들은 권력을 쥔 측에는 손쉽게 부를 불리는 도구에 불과했다. 커피의 역사도 잔혹한 노예사로 점철되어 있다.

 

유럽이 커피에 빠져들면서 포르투갈, 에스파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강국들은 커피를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되었고, 기존 식민지만으로는 물량이 달리자 커피가 자랄 수 있는 새로운 땅을 점령해 커피나무를 심었다. 그러면 그만큼 인력이 필요한데, 힘 있는 유럽 강국들은 손쉽게 식민지의 인력을 노예로 동원하는 방법을 떠올렸다. 교황청까지 나서서 노예제에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1452년 공포된 교황 니콜라우스 5세의 '둠 디베르사스 칙서'다. 그는 포르투갈의 알폰소 5세에게 '사라센인, 이교도, 신앙이 없는 자들을 세습 노예로 삼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노예무역을 합법화했다.

 

무역상품으로서 커피는 존재감이 빠르게 커졌다. 런던, 빈, 파리, 프라하, 뉘른베르크, 함부르크, 라이프치히 등 도시마다 최초의 카페들이 문을 열면서 유럽인들은 커피에 빠져들었다. 수요는 폭중했지만, 공급이 따라주지 못했기 때문에 아예 식민지에 커피나무를 심고 재배하는데, 16-19세기 노예선에 실려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의 농장으로 끌려간 흑인은 4,000만 명에 달했다.

 

커피 대국 브라질을 만든 '미인계'

 

세계 최대 커피 생산국하면 떠오르는 나라는 브라질이다. 커피나무를 재배하는 나라는 70개국 정도인데, 커피 수출국의 물량을 모두 함해도 브라질의 생산량에 미치지 못했다. 브라질의 역사는 대체로 16세기쯤부터 시작된다. 

 

당시 프랑스는 브라질과 북쪽에 접한 기아나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프랑스 해군 장교 클리외가 폭풍우와 해적의 위협을 극복하고 마르티니크섬에 커피 묘목 3그루를 옮겨 심는다. 이를 계기로 브라질을 비롯해 콜롬비아, 페루, 파나마, 콰테말라, 코스타리카 등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생산되는 모든 커피의 원조가 된다.

 

기아나를 두고 국경 분쟁을 벌이던 네덜란드와 프랑스가 브라질에 중재 요청을 하는데 브라질을 통치하던 포르투갈은 잘생긴 군인을 수소문했다. 프랑스의 총독 부인을 꼬드겨 커피 묘목을 들여오자는 미인계를 꾸민 것이다.

 

심사 과정을 거쳐 뽑힌 팔헤타는 프랑스 총독의 부인을 사로잡는다. 밀회가 계속되던 어느 날, 총독 부인에게 이별을 고하는데 총독 부인은 연정의 표시로 팔헤타에게 커피 묘목을 준다. 이 묘목들이 훗날 브라질을 커피 대국으로 만들고 엄청난 부를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