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회의 취약점
아주 흥미로운 아티클을 읽었다. 평소에도 존경하는 교수님이라 그분의 책과 아티클들을 찾아서 읽어 왔다. 컴퓨터 파일을 정리하면서 미처 읽지 못했던 자료를 읽었는데 서론 부분의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신천지 이단의 규모와 급속한 성장은, 정통교회가 그동안 '새 하늘과 새 땅'의 종말론적 복음을 외면한 채 축소되고 왜곡된 세속적 복음을 전해왔다는 사실을 반증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주장했을까? 계속 글을 읽어 내려갔다. "코로나 19 재난은 교회에 무엇을 남겼는가? 교회가 이 고난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이 재난이 드러내고 밝혀준 교회의 취약한 모습들을 그대로 인정하고,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아, 다시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사실 코로나 19로 인해 교회가 위기에 처했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그 이전부터 금이 가 있었던 교회의 취약한 부분들이 코로나 19로 인해 적나라게 드러났다라고 본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객관적으로 살펴봤을 때 본질로부터 멀어져 있었던 것이다. 교수님의 말씀대로 '코로나 19라는 위기는 교회의 지병이 무엇이었는지를 드러내고 알려준 계기의 역할'을 했다.
계속 글을 살펴보자. "주류 교회에 '기생'하는 이단들이 그렇게 발생하고 성장하게 만든 '숙주' 역할을 하는 것도 역시 주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주류 교회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기독교이단이나 사이비 기독교 단체들은, 어떤 면에서는 주류 교회의 병든 부위에서부터 발생하기 때문에, 그런 이단의 존재와 활동은 '역으로, 주류 교회가 앓고 있는 병이 무엇이었는지를 진단케 하는 증거가 되기도 하는 셈이다. 말하자면, 이단들은 주류 교회가 강조하지 못한 교리, 또는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축소하고 왜곡한 교리들을 낚아채어서, 그것을 거짓으로 바꾸고 그 이단적 교주를 신격화 하면서 주류 교회를 미혹하고 도전하며 크게 흔들게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을 말하기 위해 긴 글을 소개했다. 이단의 존재와 활동은 정통 교회가 앓고 있는 병이 무엇이었는지 진단케 하는 증거라는게 충격이었다. 말하지 못한 교리가 있는가? 눈치 보거나 혹은 받아들이기 거북할까봐 시대적 분위기를 거슬리게 하는 내용일까봐 축소시킨 하나님의 말씀들이 있는가? 거짓은 더 큰 거짓을 낳아서 미혹하게끔 했다.
80, 90년대 부흥 강사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어릴 때 만난 부흥 강사님들이 전한 메시지 중 겹쳤던 한 가지 주제가 있었다. 바로 '마라나타' 였다. 신천지가 주장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종말론적 복음이다. 신천지가 이렇게 성장하고 그 뿐 아니라 수많은 이단들이 생겨나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어떤 것을 축소하고 왜곡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교수님은 코로나19 사태가 한국교회의 치부인 '신천지 이단'을 만천하에 폭로했다는 것은, 곧 한국교회가 '새 하늘과 새 땅'의 복음을 왜곡하고 축소해왔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말한다.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엊그네 나온 설문조사를 소개한다. 새신자가 교회출석 후 믿음이 생기는 기간은 74% 정도 3년 미만이라 답했다. 항목 중에 '믿음을 갖게 하려면?' 이란 질문이 있었던 것 같다. 다양한 도움이 필요한데, 새신자 중 20% 정도 성경공부가 가장 도움이 되었다고 답했고, 15% 가 설교, 15% 기도 응답 이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지속적인 '성경공부' '설교' '기도'를 통해 복음을 깨닫고 동시에 삶에서 체험하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 여정에 있어서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했던 아티클의 내용과 전문 기관에서 발표한 설문 조사 결과를 통해 교회가 축소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말씀에 대해 가르침을 주고 받고 배우는 것'이다.
2. 제자도; 더하거나 빼지말라
지난 주 본문에서 34절까지 넣어서 나눴는데 이어서 34절과 9장 1절의 내용을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이다. 본문 34절의 뉘앙스를 좀 더 와닿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것을 참고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외경 중 하나인 도마복음을 보면 '누구든지 내가 한 것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는 사람은 나와 있을 자격이 없다'라고 기록했다.
"자격이 없다" 지난 주부터 이 말에 빠져 있었다. '자격이 없다'. 구원에 있어서는 자격이 없는 자들이란 표현이 맞다. 그런데 구원 받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길 위에' 있지 않다면 어떨까? 우리는 길이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는다. 산도 길이 난 곳을 밟고 오른다. 예수 그리스도가 만들어 놓은 길 위에 있지 않다면, 예수를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십자가'는 하나의 악세서리로 사용 된다. 그러나 당시의 십자가는 공포, 고통, 극심한 혐오의 이미지였다. 마크 드리스콜 목사는 '십자가 사랑과 죽음(Death by Love)'에서 초대교회 당시 '십자가'란 단어는 어떤 느낌이었는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시대에 이는 마치 마약 사용자의 주사바늘이나 변태가 사용한 콘돔이 세상에 가장 사랑 받는 상징이 되어 집과 교회와 몸을 장식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길 위에 있다는 것은 자신의 전부를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마가가 살아가는 시대에 '자신의 전부를 포기한다'는 소그룹 나눔의 내용이 아니다. 마가복음은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들을 십자가형에 처할 때 로마에서 기록 되었다. 실전이었다.
그렇다면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마가가 살아가는 시대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믿음과 십자가 처형 사이에서 충돌 되었을 것이다. 십자가는 비참하고 버림 받고 실패의 상징인데, 내가 예수님을 믿어도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나는 버림 받은 것인가?
마가가 기록한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깨닫길 원하셨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았노라". 당시 모든 공동체는 네로 황제의 공포스러운 통치 아래서 하루하루 떨며 살아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오히려 십자가의 길 위에서 교회로 살아가는 모든 지체들은 바른 길로 걸어가고 있다는 위로의 말씀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고난, 공포를 조성하는 뉘앙스가 아님을 확신한다! 오히려 '이 길이 맞다' 는 것을 알려주시는 위로의 말씀이다! 혹 이 길에서 이탈한 자들에게 본질로 돌아오라는 최소한의 알림 장치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믿음과 충돌하는 어떠한 이미지가 있는가? 대세를 따르지 않음으로 인해 불이익을 얻는 그 어떤 무언가가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제자도에 대해 축소시키거나 왜곡시키지 말라. 그분은 본문 말씀 그대로 말씀 하셨다.
3. 제자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는 누구인가?' 질문 하시고 말씀을 전하신 뒤에 '제자는 누구인가?'에 대해 말씀 하신다. 34절 말씀처럼 자신을 소유하지 않는 사람이 제자라 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베드로는 자신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에수님을 부인함으로 인해 자기 목숨을 소유한다. 가장 처음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그물, 배, 가족을 두고 예수님을 따랐으나 결정적인 때에 자신을 소유한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갈 5:24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고전 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 말씀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자기를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 가라'는 말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셨던 '명령'이다. 아이러니 하지만 복음의 진리가 말하는 '생명의 원리'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러한 원리를 따라 살아간다는 도전의 말씀이다.
십자가의 길과 로마의 길의 원리가 달랐듯, 십자가의 길과 시대가 말하는 길의 원리도 다른 것이다. 오늘날만 특별한 것이 아니다. 늘 다른 원리와 충돌함으로 인해 십자가의 길은 도전 받아 왔다. 어쩌면 1세기 때처럼 순교의 압박이 오는 상황이 더 좋은지도 모른다. 오늘날 십자가의 원리를 위협하는 형태는 교묘하게 침투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팀 켈러는 우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유한하고 상대적인 대상을 '절.대.적.인 대상으로 여길 때 여러분에게 유익한 대상을 궁.극.적.인 대상으로 여길 때 우상을 세우게 됩니다. 거기에 빠져들고 말죠. 직업을 신으로, 놀이를 신으로, 자연을 신으로, 국가를 신으로 온갖 신을 만들 잖아요. 왜요? 모든 게 신이 될 수 있으니까요. 모든 게 어떤 대상이든 어떤 관계이든 목적이든 물질이든 특별히 좋다고 여기는 무엇이나 여러분 인생에서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우상은 무엇인가? 삶의 중심부에 자리해서 그게 없이는 의미있는 삶도 살 수 없다고 느끼는 대상이다. 저것만 있으면 가치 있을텐데..어떤 대상이든 우상이 될 수 있다. 가족도 친구도 이력도 연봉도 성공도 칭찬도 지위도 능력도 정치적 대의든 사회적 대의든 나의 신앙도 성공적인 사역도 우상이 될 수 있다. 만약 위의 언급한 대상들이나 그 밖의 대상들을 잃었을 때, 만약 그저 좋아했던 대상이라면 슬퍼하고 말겠지만 절대적인 대상이라면 사랑했던 대상이라면 인생을 포기하고 싶어진다. 왜냐면 그게 없이는 못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피조물에 의지하고 구하는 것, 우상숭배의 삶이다. 신사참배나 순교나 이러한 일들이 현재 한국에는 일어나고 있지 않지만, 이것보다 더 무서운 마음의 중심부에 자리한 우상이 십자가의 길 위에 있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아마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심리를 뚫어 보고 글로 표현한 카슨 교수의 글은 마음을 찌르는 듯 하다.
D.A. 카슨 교수 "정말로 나는 적당한 분량의 복음을 원한다..지나치면 안 된다..나를 행복하게 해줄 정도면 충분하다..정욕과 탐심을 증오할 정도의 복음은 원하지 않는다..원수를 사랑하고, 자기부인을 귀하게 여기며, 낯선 문화에서의 선교사역을 고려할 정도의 복음은 결코 원치 않는다..나는 회개가 아니라 종교적 황홀경을 원한다..내 야망의 방향을 수정하거나 구제를 지나치게 늘릴 정도의 복음이 아니라, 그저 내 가족이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아이들이 예의 바르게 행동할 정도의 복음이면 충분하다..적당한 정도의 복음이면 된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발견하면 지키려 하는 본능이 있다. 어떤 분야든 그렇다. 자신이 정말 가치 있다고 하는 것은 목숨 걸고 지켜내고 보존하려 한다. 그러한 사람을 '장인' '마스터' 라고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격 있는 자'는 십자가의 가치 알고 지키려 하는 자다. 35절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조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의 생명이 보존 되는 것, 육신의 생명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 밖에 없다는거다. 자신의 목숨과 온 천하를 바꾸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목숨까지 내놓으며 유한하고 상대적인 대상을 얻고자 살아가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4. 신실한 제자에게 주어지는 상
우리는 역설적인 삶, 길로 갈 것을 명령 받지만 동시에 '상'이 약속 되어 있다. 지난 주에 나눴던 성경구절 로마서 8장 17절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가 될 것이다.
성경에는 섬김, 희생,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면류관'에 대해서도 말한다. 디모데후서 4장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야고보 역시 야고보서 1장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서 옳다 인정을 받고 영광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있어(계 22:12)" 라고 약속 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고백할 때에는 동시에 자신이 누가 되어야 하는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막 8:38) 그리스도를 따르며 참고 견뎌 마침내 주님 오셨을 때 영광을 받는 제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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