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마가복음

December 12, 2021 말씀 스케치 (2)

John Han 2021. 12. 11. 19:28

1. 믿음은 실전이다

 

막 9:14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예수님이 세 제자와 함께 돌아오는 길에, 다른 제자들이 서기관들과 논쟁하고 있는 것을 보셨다. 이 서기관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끌어내릴 수 있을까? 약점을 발견해서 공격할 수 있을까? 몰두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마침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실패했을 때 논쟁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믿음의 여정도 이와 같다.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닌다'는 말씀처럼, 말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 감시 받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다보니 '익명 그리스도인'을 자처 하기도 한다. 계속 되는 긴장이 피로감을 극대화 하기 때문이다. 또한 본문의 '귀신 들린 아이'처럼 곳곳에 영적 포로로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 

 

어쨌든, 당시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임무'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보이지 않는 악한 권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예배의 확장을 이뤄나가야 한다. '예배의 확장'은 지난 번 '에덴 동산의 확장'이란 개념으로 나눴었다. 영적 포로로 사로잡혀 있는 자들에게 자유케 하는 복음을 말해줄 임무가 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렇게 부르심을 받았던 것처럼, 이땅의 교회 공동체는 서로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이 사랑이 밖으로 흘러가서 스며들게 할 선교적 부르심을 받았다.

 

스티브 테일러 교수 (Missio Seminary)는 자신의 "고난의 선교적 해석" 강의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미셔널 신학에 있어서 대럴 구더(Darrell Guder)와 같이 초창기에 이 문제를 생각했던 사람들이 강조하고자 했던 바는, 하나님의 선교는 구속과 회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선교는 본질적으로 교회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적인 활동의 결과입니다. 피조 세계를 회복하고 치유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에 기인합니다."

 

선교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교는 피조물을 회복하고 치유하기 위한 선교로 보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은 제자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맡겨진 사명이다.

 

하나의 예로 '욥'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부유하고 자녀도 많았고 많은 복을 받았고 선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우리가 알듯 하루 아침에 다 무너졌다. 재산, 자녀 뿐 아니라 자신의 건강 마저 잃는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자신과 가까운 아내와 친구들이 더 괴롭게 한다. 특히 친구들은 욥에게 숨은 죄가 있는지 없는지 계속 추궁한다. 

 

그러나 욥기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큰 사실은 땅에서 일어난 일 너머, 숨겨진 배경이 있다는 것이다. 욥기 1장 9-11절에 나온다. 사탄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한다. "욥이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 하겠습니까?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십시오.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그는 주님을 향해 욕할 것입니다." 

 

이것이 욥기 말씀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 강조한다. 사탄이 사실상 도전하고 있는 대상은 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란 것이다. 욥의 고난 너머에는 이러한 작용이 있었다. 우리는 문자로 된 욥기 스토리의 처음과 결말을 알기 때문에 다 파악할 수 있지만, 우리 실제 삶에서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마지막에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할 수 없다고 가르치신다. 

 

어쨌든 제자들은 귀신 들린 아이 아버지의 진술처럼 임무를 감당하지 못했다. 이러한 모습에 예수님은 실망하신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탄식 하신다. 귀신 들린 아이 아버지의 말이 더 큰 충격이다. 지금까지 예수님께 간청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면 절박함과 확고한 믿음이 있다. 야이로, 12년 동안 혈루증 앓는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모습을 보면 그렇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제자들로 인해 실망이 컸다. 그렇기 때문에 반응이 전혀 다르게 나왔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영적 슬럼프가 온다는 것을 넘어 누군가는 실망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뛰어넘을 필요가 있다. '성도' 라 일컬음 받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며 포로로 사로잡힌 세상을 치유할 임무가 있다. 실전이다. 이 실전 무대는 늘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연습은 없다. 

 

엡 1:21-22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복음서 뿐 아니라 말씀은 영적 전쟁과 마귀의 세력에 대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1세기 때는 뭔가 문명적으로 덜 발달 했기 때문에 존재했고, 지금은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으니 과학적으로 증명 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무의미하다. 당시의 기적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존재한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가 익숙한 현대인이 인정하기 힘든 부분일지 모르다 이 싸움은 진짜다. 실전이다. 

 

 2. 예수님께 피하라

 

막 9:25-27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제자들은 실패 했지만, 예수님은 어떻게 쫓아내셨을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마법이나, 약을 먹였거나, 어떤 의식을 치루거나 주문한 것이 아니다. 당시 헬라 마술사들 처럼 행하지 않으셨다.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는 말씀은 어떤 치유 주문이나 공식이 아니다. 예수님의 권위로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 하시지 않으셔도 귀신은 쫓겨났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반복해서 계속 들었다. 우리가 다루지 않았지만 앞의 본문 '변화산 사건'에서 절정으로 선포 되었다(막 9:2-13). 변화산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분에 대해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신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영광과 찬송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임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 위대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산 위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런 광채가 비춰졌을 때 모세와 엘리사가 나타난다. 모세, 엘리야는 유대인에게 어떠한 인물인가? 다윗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개념의 어떤 위대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존경하는 마음조차 가지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건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러나 이 땅의 어떤 사람도 예수님보다 더 클 수 없다.

 

히브리서 1:2-4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경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마침이시다(계 22:13).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귀신을 쉽게 내쫓으시고 귀신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시간, 장소, 생명, 죽음에 대한 권세를 보여주신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알고 끊임 없이 새기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 피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실패 이후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께로 향한다. 자신들의 문제를 예수님에게 말한다. 

 

지난 주 '제자도'에 대해 나눴다. 우리는 이 제자도를 스스로 해낼 수 없고 갈 수도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더 기도하고 더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 하신다. 우리 스스로에게 '제자도'를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능력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 욥의 모습에서 알게 됐듯, 우리는 그 너머의 어떠한 작용에 대해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 아래에 있다.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함에 자책하지 말라. 위의 고백은 사도 바울의 고백이다.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백 하는 자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예수님을 향해 간다. 예수님께 피한다. 

'하나님의 일' 이 무엇인가? 보통 하나님의 일에 대한 개념을 '사역'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일'은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우리, 공동체)를 통해 역사하시도록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고 인도함을 받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조건은 '내가 예수님께로 피하는 것'입니다. 

 

참 아이러니 하죠. '피하다'는 것은 쫓기거나, 강한 자를 보고 두려워 하거나, 포기하는 상황 때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무기'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이 나올 때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된다.

 

제자들의 실패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문장을 또박또박 말하지 않아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문제는 과거의 성공 때문에 자신의 능력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더 더 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처럼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 

 

드웨인 존슨이 헬스를 하면서 각 부위별 운동을 할 때 'Focus' 란 단어를 지속적으로 말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우리는 끊임 없이 'Focus'를 외쳐야 한다. 본능적으로 예수님께 뛰쳐가야 한다. 특수 임무를 언제든지 해내야 하는 군인들이 평소에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붙이는 훈련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본능을 거스르는 훈련을 통해 실전 때 그대로 그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서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이 최악의 상황을 염두해두고 훈련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변동성에도 집중하여 이기기 위함이다. 

 

"We want the storyline of our lives to go from strength to strength, from success to success, and end happily ever after." "But throughout the Bible we see something completely different - a persistent narrative pattern of life through death or triumph through weakness." - Tim keller

 

(사회적 분위기는 더 강해지고, 더 성공하고, 영원히 행복한 상태에서 끝나는 것을 추구하지만, 성경은 완전히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죽음을 통해 얻는 생명, 약함을 통해 얻는 승리에 대해 지속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영적 전쟁의 실전에서 단 한순간도 나를 신뢰하지 말라. 나의 능력을 믿지 말고, 이전에 비슷한 일을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잘 대처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 말고 무조건 예수님께 피하라. 문제의 시작도 끝도 주님 손 아래 있다. 

 

3. 기도 먼저 (JUST ASK)

 

본문의 마무리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집에 있는 것에서 마무리 된다. 마가복음에서 집안에 비공개적으로 모이는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더 가르치고 드러내시는 배경으로 나온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왜 귀신을 쫓을 수 없었는지 묻는다.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다. 이것은 마가복음에서 첫 번째 등장하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다. 모든 기도의 가르침이 그렇듯, 기도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이라 가르치신다. 

 

기도 하는 것, 믿는 것은 모든 영적 능력이 나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예수님은 분명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 직접 보여주셨고, 제자들 역시 봐왔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중요시 하지 않았을지라도 기도는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어쩌면 제자들의 '기도'에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다. 

 

주중에 '기도 먼저' 란 책에서 이러한 내용을 발견했다.

 

"성경은 우리가 옳은 자세, 시각, 목적으로 나아오지 않아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을 수 있달고 분명히 말한다. 야고보는 이 점을 더없이 분명히 강조한다. 야고보서 1장 3절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헬라어에서 '정욕'은 간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서 말씀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희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이유는 너희가 간음을 저지르는 사람처럼 기도하기 때문일 수 있다." 

 

저자는 부부를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남편이 아내에게 "결혼 전에 나의 요구를 들어를 들어준다고 약속 했던 것 기억해요?" 라고 말하면서 '지금 내 요구는 당신의 친구를 만나는 것인데, 당신의 친구와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세요." 말한다면 이 요청에 대해 수락할 리는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하는 만족을 다른 것에서 얻기 위해 요구하는 일이 바로 간음하는 사람처럼 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무언가를 얻음으로 인해 기쁨을 얻고자 할 때 하나님은 말씀 하신다. "왜 내게서 기쁨을 찾지 않느냐?"

 

제자들은 왜곡된 메시아관을 갖고 있었음을 말했다. 어쩌면 제자들 역시 예수님처럼 귀신을 쫓아내고 이적을 일으키면서 자신들이 얻게 될 뭔가를 바라고 있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기도'는 약함에서 얻는 승리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이 더 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간구했을 가능성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적 전쟁 이란 실전에서 사용할 '기도'라는 무기를 주셨다. 이 기도 외에는 가능하지 않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나 간음을 저지르는 사람처럼 기도하는 간구는 기도 마저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의 부족함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께 피하지 않는 것, 기도하지 않는 것, 기도 하더라도 다른 동기로 행하는 것은 죄가 될 수 있다. 

 

연약한 믿음을 강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리라! 그때에 주님은 일하실 것이다. 모든 것은 예수님의 손 아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