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마가복음

November 21, 2021 말씀 스케치

John Han 2021. 11. 20. 14:16

마가복음 8장 14-21절

 

14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15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6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7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8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19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20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21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1. 경고 (warning)

 

제임스 사이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에서 세계관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의합니다. 

 

"세계관이란 이야기의 형태로 혹은 실재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일관적이든 비일관적이든) 보유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부분적으로 옳거나 완전히 잘못된)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몸 담을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주는 하나의 결단이요 근본적인 마음의 지향이다."

 

글에서 알 수 있듯 세계관은 '하나의 결단' 이며 '마음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마음'에 대해 강조합니다. 지혜, 감정, 욕구와 의지, 영성, 지성 등 모두 포함해서 곳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인간을 규정짓는 핵심적 요소'로 여깁니다. 

 

그래서 각자가 가진 '세계관'은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깊숙이 깔려 있는 세계관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본문 15절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앞 뒤 말씀을 살펴보면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습니다. 떡이 한 개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을 챙기지 않은' 부족한 준비성에 대해서 '경고' 하신 걸까요? 예수님은 그정도로 많이 배고프셔서 화를 내신걸까요?

 

그러면서 15절 뒷부분에 보면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 경고 하십니다. 아니, 지금 '떡 한 개'만 챙긴 것이 잘못된 레시피로 만들어진 떡일까요? 그나마 있는 떡이 잘못된 재료로 만든 것이라 예수님은 꾸짖으신걸까요? 

 

 

2. 누룩에 대한 경고

 

 

'누룩'의 용도는 일주일 전에 만든 반죽에서 남겨 놓은 아주 적은 양의 반죽 덩어리로 새로운 반죽에 넣어 떡이 발효되어 부풀게 하는데 썼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누룩'은 긍정적인 요소로 쓰일 때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가 더 많았습니다. 거룩하지 못한 모습, 죄, 악한 행동 등을 의미할 때 '누룩'을 사용했습니다.

 

당시 '쿰란 문헌'에서 '누룩'을 '완악한 마음'에 대한 의미로 썼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완악한 마음이 제자들 가운데 침투하여 오염되지 않도록 경고하신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악한 마음(or 생각)은 무엇일까요? 바로 바리새인들의 세계관은 '군사적, 정치적 메시아'가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표적을 보여주면 내가 당신을 믿겠다'라는 조건이 아니라 과연 이 예수라는 자가 이방인(특히 로마)들을 무찌르고 유대인을 구원하는 자로서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를 시험하는 악한 의도였습니다. 바로 그러한 세계관이 바리새인들의 '누룩'입니다. 

 

이어서 헤롯의 누룩은 무엇일까요? 헤롯 역시 메시아에 대해 바리새인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헤롯은 그러한 메시아가 두려웠고, 죽이길 원했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과 제자들이 떡을 하나만 가지고 온 행동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예수님은 엄중히 '경고' 하셨을까요?

 

14절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사실 제자들은 깜빡 잊어서 떡을 놔두고 온 것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떡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의도적으로 무시하다' 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됩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향하는 곳은 유대인 땅이 아니라 이방인 지역입니다. 제자들은 드디어 임한 '하나님의 나라'에 이방인들이 함께 포함되는 것이 '싫어서' 이방인의 땅에서 표적(sign)이 일어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방해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세계관은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과 전혀 관계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에게 배타적인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군사적, 정치적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다를바 없습니다. 군사적 메시아관에서 이방인은 그저 무찌르고 정복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군사적 메시아관에는 오직 유대인들을 위한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제자들이 엉뚱하게 떡을 일부러 놔두고 온 행동은 순진하고 무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군사적 메시아관이 그 마음과 생각에 깊숙이 자리했기 때문에 나오는 왜곡된 행동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들과 식탁 교제를 할 때도 제자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들의 세계관에는 왜곡된 메시아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픈 자들을 고칠 때도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미 그들의 마음은 다른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데가볼리 같은 이방 지역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하고 말씀을 전할 때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예수님과 달랐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불순종'의 행동을 보입니다.

 

예수님의 경고에도 자신들의 악한 마음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떡을 가져오지 않는 행동' 그 자체에 대해서만 수군수군 거리는 것은 이미 그들의 마음 중심에는 헤롯이나 바리새인과 다를바 없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표적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맞는지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제자들은 눈은 뜨고 있지만 메시아를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유대인을 풍성히 먹이시고, 부스러기 한 조각을 이방 여인 한 사람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먹이셨습니다. 칠병이어 기적을 통해 이방인들에게도 풍성한 양식을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눈 멃'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모든 기적을 보고, 말씀을 읽고 보고 듣고 하지만 영적 맹인이 되어서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깨닫지 못하는 영혼에 대해 한탄하십니다. 

 

육신의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것이 불쌍하고 탄식할 일이 아니라 영적으로 눈 먼 자로 있다면 그것이 탄식할 일이고 가슴을 쳐야 할 일입니다. 벳새다 맹인은 못 보지만 보게 됩니다. 당시 무리들 가운데 예수님을 따랐던 자들도 많이 알지 못하지만 메시아에 대해선 바르게 알았기 때문에 따랐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영적 눈 멂' 상태로 가는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경고합시다. 그리고 '영적 눈 멂' 상태로 만들게 하는 '누룩'을 경계합시다. 죄는 퍼지고 침투한다는 점에서 '누룩'과도 같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회개하지 않는 교인은 쫓아내라고 말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반죽 덩어리에 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죄가 품어지고 죄가 들어오면 반드시 '죄를 낳'습니다.

 

그러한 원리로 죄가 퍼지고 있는 것은 세상 곳곳에 심어져 있습니다. 일터에서도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의 누룩이 퍼지지 않기 위함입니다. 가정이 작은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가 품어지지 않기 위함입니다. 교회에서 복음이 풍성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기를 마음으로부터 지향하고 결단하게 하는 세계관의 경계가 무너지고 오염되게 하는 수많은 누룩은 여전히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역시 그 누룩이 마음 덩어리 곳곳에 퍼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기도 합시다. 내 마음과 삶을 더 털어내주셔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남기를 기도합시다. 

 

 

3. 모든 자에게 자신을 내어주심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19절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20절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예수님은 왜 오병이어 기적을 언급하신걸까요?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깨우치고자 이 기적을 언급하셨습니다. 무리를 먹이고 남은 것을 거둔 바구니 수를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열둘'이라 답합니다. 

 

이 열둘은 의미있는 숫자입니다. 아마 유대인들은 12 라는 숫자에 대히 이스라엘 12지파를 떠올렸을 겁니다. 제자들 역시 대답하면서 12지파를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칠병이어 기적 이후에 몇 광주리가 남았는지 기억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기억하고 '일곱'이라 답합니다. 

 

그렇다면 칠병이어 기적의 일곱 광주리는 무엇일까요? 이 기적이 일어난 장소는 '데가볼리'입니다. 이제 몇 번 들었기 때문에 당시 누가 사는 지역인지 아시죠? 칠병이어 표적은 도래한 하나님 나라 안에 이방인들이 포함 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칠병이어 표적을 경험한 사람들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방인들입니다. 따라서 무리들이 먹고 남은 '일곱 광주리'도 이방인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신명기 7장 1절을 볼까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신명기 7장 1절은 가나안 땅의 7족속을 언급하는데, 숫자 7은 이방인을 연상시키는 수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과거 이스라엘이 아니라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신다는 겁니다. 유대이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다 허시고 새 이스라엘을 창조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 칠병이어 표적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 것은 '알아가고' 있었지만, 그 의미에 대해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은 알고 있으나 어떤 메시아인지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 나라가 참으로 무엇인지 알 수도 없습니다.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새 이스라엘을 창조하셨는데, 우리는 계속 교회와 세상 사이에 높은 벽을 만들어 내고 살아가진 않습니까? 

 

교회 공동체가 그러한 상태라면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는 경고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넘어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말씀을 아는 것과 말씀을 통해 깨닫고 해석하는 것은 큰 차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 신앙 고백은 잘못된 겁니다. 사도신경 외우고 주기도문 외우고 교리 문답 백날 배워봐야 소용 없다는 것은 무용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거 아닙니까. 

 

예수님은 유대인도 배불리 먹이셨고 이방인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모든 자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정치적 메시아도 아니고 군사적 메시아도 아니고 고난을 받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하신 메시아 입니다.

 

우리의 세계관 안에 침투한 누룩은 무엇입니까? 보수면 지옥 갈 탐욕의 사람들입니까? 진보면 나라 팔아 넘길 사람들입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지옥갈 무리라고 지적합니까? 

 

교회는 어떤 메시아관에 갇혀 있습니까? 예수님은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관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는 무리들로부터 '호산나, 호산나' 칭송을 받았지만 그 길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목적도 아니었고요. 

 

그런데 교회가 정치적 메시아관에 갇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는게 맞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맞습니까? 진보 성향의 사람들은 아마도 '그렇지 그렇지 보수들은 정치적이야 잘못 되었어' 보수 성향의 사람들은 '맞아 맞아 진보들은 아닌척 속이고 있어' 맞장구를 칠 수도 있지만 두 집단 모두 동일합니다. 

 

어떤 성향의 정치적 메시아관이든 '십자가 고난의 짐을 지고 세상을 구원한 메시아관'이 아닌 다른 수식어가 붙는다면 '누룩'입니다. 교회가 부흥 되어야 하고, 교회 안의 성도 수가 점점 늘어나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치적 힘을 길러서 교회에 유리한 쪽으로 정책을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까? 

 

교회나 단체들이 유명 하거나 성공 했거나 높은 지위에 있거나 돈을 많이 벌은 사람을 강단에 세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경제적 영향력을 가지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교회로 인도할 수 있겠다는 경제적 메시아관 때문입니까? 

 

'다른' 메시아관이 아닙니다. 잘못된 메시아관이 자리한 교회 혹은 그리스도인은 잘못된 '하나님 나라'를 그릴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나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처럼 세상을 위해 섬기는 사명을 잊게 됩니다. 

 

더 최악은 교회가 정치를 위해 경제를 위해 존재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이웃이 아닌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집단으로 여겨진다는 겁니다. 이것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모습이 아니라, 맛을 잃어서 길에 버려지는 소금의 모습입니다. 

 

21절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저와 여러분 모두 바리새인의 누룩, 헤롯의 누룩을 제거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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