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마가복음

November 28, 2021 말씀 스케치

John Han 2021. 11. 27. 14:42
마가복음 8:27–34 (NKRV)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1.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 장소 : 예수님은 제자들을 뱃새다에서 북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진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으로 데리고 가신다. 이 성읍은 헤르몬 산 남서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자연과 삼림의 헬라 신인 '판'의 이름을 따서 파네아스 혹은 파니온 이라고 불렀다. 헤롯 빌립은 분봉왕으로 임명된 후 그 도시를 확장시키고, AD 14년 가이사 아구스도를 기념해서 그 도시에 가이사 라는 이름을 붙였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가는 중이었고, 예수님은 '길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하셨다. 

 

- 질문 : 예수님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마가복음 시작 1장 1절 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선포 (1:11), 귀신들이 예수님을 누구라 인식하는지 등 일관성 있게 다루고 있었다(중심 주제). 그래서 대중들은 예수님의 기적에 신기해 하고 놀라면서 호기심을 가졌다. 헤롯 왕은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이라 생각했다. 바리새인은 자신들이 바라는 '메시아'인지 의심을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제자들'은 여전히 '그가 누구이기에..'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누구인가?'에 대한 바른 인식이 요구 된다. 각자가 느낌으로 알고 있는 예수님으로는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없다. 아, 물론 순풍이 부는 바닷가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폭풍우가 몰아치는 순간 같은 예수님을 믿고 알고 있더라도 각자 '예수님이 누구인가?' 확립 했던 내용에 따라 적나라게 드러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 지혜가 많은 선생이라 말한다. 어떤 이는 사회정의를 세운 분이라 말한다. 어떤 사람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분이라 하고, 종말을 가져올 분이라 말하기도 한다. 또 어떤 부류는 정치적 혁명가 혹은 사회 혁명가라 자신 있게 말한다.

 

이 땅의 종교들도 예수님에 대해 말한다. 고대 영지주의자, 힌두교, 뉴에이지 경계에 있는 현대판 영지주의자는 예수님은 영적 지식이 높아서 신적 존재와 연합할 수 있는 존재라 말한다. 사이비 이단들에게도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의'가 내려져 있다. 

 

이런 복잡하고, 소음에 불과한 소리 가운데 '베드로의 대답'이 등장한다. '주는 메시아시니이다' 이 대답은 옳은걸까? 아니면 틀린걸까? '둘 다'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라는 것은 틀림없이 옳은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왕'이다. 하지만 베드로가 '메시아의 역할'을 오해하고 있다는 부분에서는 틀린 답이다. 베드로에게 고난 받고 죽으실 메시아는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각자 자신의 생각과 경험에서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는 위험한 부분이다. 말씀을 통해 내 생각과 경험이 세워져 가는 것이지 반대로 가는 경우는 내가 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들어내는 우상이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도록 형성하는 것일까? 재물&번영 vs 희생, 악인의 심판 vs 원수,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 나의 필요 vs 예수님의 권위, 순종)

 

2. 메시아

 

-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 : 헬라어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를 옮긴 것이다. '기름부음'을 뜻한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의미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된다는 것을 말하는데, 선지자 제사장 왕 이라는 세 부류가 그렇다. 여기서 '왕'은 유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스라엘이 점점 약해져서 BC 586년 느부갓네살에게 함락 되었을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다윗 같은 강력한 새 왕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더 크게 가졌다(통독 '사무엘하'를 참고;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리라 = 이기리라 = 다윗 왕은 늘 승리하는 사람). 사무엘하 7장 11-16절을 보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왕위가 영원할 것이며' 그의 후손이 보좌에서 영원히 다릴 것이라 약속 하셨다.

 

이러한 기대감은 구약과 신약 중간기에 일어난 '마카베오 혁명' 후에 더 높아졌다.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마지막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기적을 행할 능력을 갖고 있고, 강하고 지혜롭고, 거룩하고, 죄가 없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파멸시킬 자라 여겼다.

 

(시편 17편 23-30 솔로몬의 시편에서 등장)

 

- 장소 : "'빌립보 가이사랴'로 가는 길"은 우연이 아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빌립보 가이사랴로 가는 도중 '갈릴리 사람 유다'의 고향인 가말라의 정상 서쪽으로 지났다. 이 유다의 아들은 시편 17편의 예언을 이루고 위해 AD 66년 로마에 칼로 맞섰다. 갈릴리 사람 유다가 만든 '시카리'라는 분파는 무력을 시도 했으나 실패했다.

 

'가말라'는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 중 하나다. 예수님이 이 지역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인지 말해보라' 하신 것은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여겨 왔던 메시아에 대한 개념에 대해 끊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특히 힘과 지배의 논리는 완전히 제거할 것이다. 베드로를 비롯해 제자들의 '시야'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조금 나아졌지만 아직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은 흐릿한 상태다.

 

- 말씀 : 31절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 "그는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 가르침은 제자들 뿐 아니라 유대인 모두 받아들이기 힘든 개념이었다. 오랜 전통으로 보존 되었던 메시아의 역할이 아니라 아예 근원을 뒤집어 엎어 다시 '메시아의 의미'를 정의한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목숨걸고 지킨 '토라(율법)'를 가르치고 이스라엘을 다시 굳건하게 세우는 역할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과 죄인을 향한 용서로 들어갈 수 있다는 내용을 가르치셨다. 

 

구약의 왕들처럼 지배하고, 성전을 다시 장엄하게 건축하고, 메시아의 권위로 압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지'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열두 제자를 불러 새 이스라엘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계명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다시 해석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바다와 같은 자연을 다스리는 권능을 부여 받으셨고, 하나님으로서 말씀을 하시는 분. 마가복음 1장 1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다. 

 

유대인들이 가졌던 메시아에 대한 생각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완전히 다른 '사명'이다. 승리, 성공, 큰 등의 개념이 아니라 거부 당하고 고난 받고 죽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인자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메시아의 고난, 죽음, 부활에 대해 아마 감명 받기 보다 충격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예수님은 32절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신다. 확신을 가지고 '이 말씀'을 하셨다. '말씀'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앞으로 '수난과 고통'이 올 것이라 말씀하셨다. 

 

우리는 무엇을 듣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설명)을 들었을 때 유대인 뿐 아니라 열 두 제자들도 충격 받고 좀 더 나아가 '모욕적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견딜 수 없어서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한다. 로마와 로마와 협력하는 국가들을 물리치고 독립 국가 이스라엘을 세울 다읫 계열의 메시아가 고난 받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말씀 통독, 말씀을 묵상하는 것, 말씀을 공부하는 것, 가장 우선 순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듣기 위함이 되어야 한다. 설교자의 유명함 무명함으로 말씀의 질이 달라지는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제대로 '설명'해주는지? 분별력이 필요하다. 

 

복음은 추상적인 형태가 아니다. 실체가 없는 문자주의가 아니다. 노트에 기록된 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선명하다. 복음일수록 분명하고, 삶에서 진하게 우러나온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명확할수록 나의 삶에서 그 값은 정확하게 나온다.  

 

3.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다

 

- 말씀 : 예수님은 그저 사랑만으로 포용한 것이 아니다. '요구하셨다'. 이것이 강압적인가? 불편한 부분인가? 때론 '율법적이다' 말하는 경우가 있다. 메시아가 누구인지? 에 따라 자연스레 메시아를 따르는 자들의 길도 동일해진다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우리는 들었다. 알고 있다. 깨달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깨달아가기 위해 함께 있지 않은가? 어쨌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34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메시아'의 사명에 대해 승리, 정복 등이 아니라 고난, 죽음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무리와 제자들에게 자신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명'하신다. 복음의 역설이다. 우리 자신이 죽어야 우리는 참된 생명을 받는다. 복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대가로 요구하지 않지만, 우리의 모든 것을 대가로 요구한다. 

 

어떤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이 임하지만, 동시에 나의 옛 자아, 교만, 악함을 포기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길 원한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스스로에 대한 권리 주장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뤄가시도록 내어드려야 한다.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롬 8:17)"이다. 

 

유대인들은 이 땅에서 이스라엘 왕국이 다시 부유하고 강해져서 자유를 얻고 영광을 얻을 것에 대해 희생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 자유와 영광의 참여를 말씀하시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다. 

 

- 삶 :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결과는 어떻게 될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역설적이다. 예수님을 위해 나를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영적 생명을 얻는다. 내가 가진 것을 움켜쥐고 지키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 다 없어져 버릴 것이다. 야고보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약 1:10)" 말한다. 베드로는 이사야 40:6, 8절 말씀을 인용하여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 1:24-25)." 말한다. 사도 요한은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말한다. 

 

이 땅의 메시아관으로만 보면, 우리는 뒤쳐지는 것 같고, 패배자이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나이에 맞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 같고, 실패한 삶인 것 같고, 준비되지 못한 사람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메시아의 삶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을 얻은 자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역설적인 삶이다. 

 


 

말씀을 준비하며..

 

지난 주 나눔 내용이 계속 마음에서 울린다. "오고 싶어하는 요소가 갖춰진 교회" 그런데 왜 오고 싶어할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혼자 김칫국 마시는 질문일 수 있지만..그냥 생각을 계속 했다. 그러나 자신의 필요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에 대해 강조한다면, 어떻게 볼까? 발걸음 하기 부담스러운 교회가 될까? 함께 하는 자들이 있을까? 함께 하는 자들이 많아야 좋은 것일까? 대중과 제자 사역을 어떻게 동시에 지혜롭게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대중 사역, 제자 사역을 동시에 하셨다)

 

죽음으로써 살아나고, 겸손함으로써 얻게 되는 하나님 나라..우리는 정말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하면서 그 원리도 함께 원하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 나라에 대해 왜 좋아할까? '정의롭기 때문일까?' '약자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그럴까?' '사회학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는걸까?' 그냥 이러한 질문들이 끊이지 않았다. 복음 안의 불순물 제거에 요즘 꽂혀서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