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갈라디아서

October 31, 2021 말씀 스케치

John Han 2021. 10. 30. 01:51

갈라디아서 6장 1-5절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1. 화평하게 하는 자 (peacemaker)

 

저는 오랜만에 인사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지냈니?'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등의 인사보다 '평안합니까?' '그동안 평안하셨나요?' 라는 인삿말을 건냅니다. 이 안에는 하나님의 샬롬이 마지막으로 만나거나 연락했던 시점부터 지금까지 잘 유지되었는가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괜히 그런 인삿말을 건낸건 아니겠지요. 

 

상대방 혹은 상대방이 속한 공동체든 가정이든 삶에서 그렇지 못한 것을 미리 알고 감지하고 말을 꺼낸 것이죠. 크라이플 공동체 안에서 저에게 이러한 인삿말을 앞으로 듣는다면 '아..!' 하면 됩니다. 사실 평안하기를 바라면서 인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에게는 '평안'하지 못하도록 하는 '원수'가 늘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악한 세력들, 사탄 마귀는 늘 우리를 속이고, 또한 사람들끼리 갈라 놓으려고 속삭입니다. 특히 하나님과 조금이라도 가까이 하려 하면 온갖 핑계 할 일들을 마구마구 만들어 줍니다. 바쁘게 한다던지, 오히려 때론 더 일이 잘 풀리는 상황도 민감하게 깊이 바라보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사탄은 무력하게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고 성령의 교제를 이루도록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가족을 통해서든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든 심지어 부부나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통해서든 당연히 공동체 안의 사람들의 약점을 건드려서 떨어뜨려 놓으려고 계략을 펼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좋은게 좋다'고 흐지부지 하게 넘어가선 안 됩니다. 한 쪽에서는 '연합' '하나 됨' '한 마음'을 부숴버리기 위해서 전투 태세로 다가오는데, 우리는 체면 차리고 교양 있는 사람처럼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화평을 이루신 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죄로 인해 분열 되었지만, 그 사이에서 예수님은 속죄 제물로서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심으로써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여기서 화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단순히 좀 가까운 친구사이가 원만하게 해결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였습니다. 이 원인인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제거 되면서 화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수 있는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그 이름의 능력 때문인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이 화평을 위해 좀 과격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바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마태복음 23장 23-24절)' 라고 거친 말을 퍼부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사탄은 하나님 나라가 흥왕하는 것을 당연히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아니라 다른 길로 빠지도록 종교 지도자들을 이용했어요.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가장 큰 계명과 말씀들과 정반대의 내용들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 15-20절에서 공동체 안에서 내보내야 할 성도도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 계속 죄를 짓는 이들은 마 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말씀하셨습니다.

 

왜 오늘 본문의 서두에 이 내용을 언급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읽었던 본문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2. 갈라디아 교회 상황

 

본문 1절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바울이 쓴 편지들을 보면 따뜻한 인사로 시작해서 격려도 있고 칭찬도 있고 때로는 질타도 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는 시작부터 사도 바울의 강직함, 그 특유의 전투적인 모습이 보입니다. 다름 아닌 '다른 복음'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미혹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을 보면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 원인이라 해요.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유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대인'들이 이방인에게 개종하려면 할례를 받아야 구원 받는다라 주장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킬 수 있고요. 이방인들 중에 '헬레니즘' '영지주의' 사상에 젖어 있어서 '방종주의'를 주장하며 미혹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을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 자주 접할 수 있었는데 '니골라 당'이 이러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을 '거짓 형제'라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유대교 지도자 출신으로 바리새파 출신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바울은 '율법'이 잘못되었다고 한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이 할례를 통해 유대인이 되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거짓 주장에 대해 반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율법 행위, 종교 행위의 종으로 거젓의 종으로 인도했던 것이죠.

 

범죄한 일이 이러한 거짓 복음을 전한 행위일 수도 있고 '고린도교회'에서 드러난 심각한 윤리적인 죄일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자신의 계모와 동침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그 죄를 그대로 덮었습니다. 이런 심각한 죄를 바로 잡지도 않고 그냥 놔두고 넘어가려 했던 것이죠. 

 

어쨌든..(더 추가할 예정)

 

 

3. 예수 그리스도의 몸

 

바울은 '회개하지 않은 죄'를 그냥 조용히 넘어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감추더라도 그 죄는 결국 공동체 안에서 문제가 되고 퍼져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종류의 '범죄한 일'이든 간에 그 죄의 문제를 공동체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면 어떤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죄를 지을 수 있지만,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속해 있기 때문에 몸을 이루고 있는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절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그리고 26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그래서 예수님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공동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 죄를 향해 달려가는 자들을 향해 권면하되 듣지 않으면 내보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다만 우리는 누군가의 죄에 대해 말할 때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다뤄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을 통해 공동체 내에서 어떠한 사람이 심각한 죄를 지었을 때에 공동체는 어떻게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하는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라는 집을 지을 때 꼭 기억해야 할 부분입니다. 왜냐면 건축 과정에서 늘 낭만적인 일들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4. 누가 화평하게 하는 자인가?

 

1절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너 자신을 살펴보아..'

 

'신령한 사람들'

 

바울은 공동체 내에서 누군가 죄를 지었을 때 무시하고 넘어가라고 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들춰내서 처리하는 방법도 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그 사람이 다시 회복하여 공동체에 돌아오게끔 한다는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사람들'이 가서 죄 지은 자를 교정해주고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령한 사람은 '영적으로 성숙하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하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 입니다. 

 

믿음 안에서 성숙 하고 이러한 민감한 상황을 지혜롭게 다룰 수 있는 성숙한 사람들이 문제를 다뤄야 가장 큰 목적인 회복하여 돌아오게 할 수 있고, 권면해도 듣지 않았을 때에 공동체에서 내보낼 수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죄'에 대해 민감하고, 심각한 죄의 유무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성숙한 사람의 윤리적으로 완벽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범죄가 드러나게 되는 기준으로 삼은 '말씀'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 말씀을 늘 가까이하고 차근차근 말씀으로 훈련 받은 사람이 가서 권면하는 것이 낫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신령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뉘앙스로 들리나요? 뭔가 즉석에서 느껴지거나 말씀을 들었다 하여 전달하거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그러한 사람들을 성령 충만한 사람 성령의 사람이라 말합니다(여기서 나는 은사중지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 안에는 항상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 성령 안에서 걸어가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영적으로 성숙한 자'들로 양육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들'

 

본문 1절 '바로잡다'의 단어는 여러 의미로 사용 되는 단어입니다. "부러진 뼈를 회복하다, 그물을 수선하다(마 4:21), 항해를 마친 배를 다시 정비하다" 다양하게 쓰였습니다. 어쨌든 그만큼 회복의 과정은 아주 세심하고 인내를 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온유한 사람들'이 가서 바로 잡으라(회복 시키라)고 말합니다. 무턱대고 가서 비난과 정죄로 튕겨나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세심하게 교정하고, 다시 비틀어지거나 찢어지려 할 때에 인내하며 회복시키라는 것이죠. 

 

본문 2, 3절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3절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영적으로 성숙하고 온유한 사람들은 '교만'한 마음으로 바로 잡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지고 있는 짐을 대신 진다는 마음으로 회복 시키는 일에 참여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의 짐을 대신 지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처럼, 우리도 공동체 안에서 범죄한 형제 혹은 자매의 짐을 대신 지며 회복시키는 것이 말씀대로 행하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은 뭔가 대단한 사람인 것 마냥 여기면서 다른 사람을 회복시키려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런 면에서 저 사람보다 영저긍로 성숙한 자야, 나는 이렇게 하지 않았으니 좀 더 나은 사람이네' 위안 삼으면서 스스로 의롭게 여기면 자신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비교'는 굉장히 좋지 않은 거에요. 공동체 내에 있는 지체들을 보면서 비교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공동체와 비교하면서 더 낫다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려워하라'로 번역 되어 있는 헬라어 '스코폰'은 '주시하다' '경계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자신 스스로 조심 또 조심해서 살피고 죄에 빠지지 않도록 미혹 받지 않도록 온갖 유혹을 경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넘어진 지체들을 일으켜 세울 수 없습니다. 영적 교만을 가지고 할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5. 서로 짐을 지고 집을 지어라

 

2절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말했는데, '지다'라는 단어가 갈라디아서 안에서 세 가지 형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5장 10절 바울은 그들 가운데 있는 거짓 선생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거짓과 혼란으로 빠뜨리려 한 행동에 대해 '심판을 받을 것'이라 경고 했습니다. 이 심판이 무거운 짐이 됩니다. 

 

6장 5절 각 성도들에게 '자신의 짐을 지라' 권면합니다. 이것은 어깨에 메는 짐처럼 등에 메는 여행자의 짐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6장 17절 여기서 바울의 말은 예수님께서 골고다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장면(요 19:17)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쨌든 이 짐은 성도가 혼자 힘으로는 지고 갈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죄의 짐이 될 수도 있고, 유혹의 짐일 수도 있고, 감정의 짐일 수도 있고, 재정적인 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각 지체들이 너무 무거워서 홀로 지고 갈 수 없는 짐을 함께 '져야' 합니다. 

 

누군가만 일방적으로 계속 지고 가면 번아웃 되거나 지쳐서 함께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짐을 기쁨으로 여기서 함께 짊어질 때 진정한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산을 오르거나 군인이 행군할 때에 각자의 짐을 지고 출발합니다. 몇 십 키로 되는 짐을 지고 긴 여정을 떠나기 위해 기초 체력을 기르고 인내를 기르고 훈련합니다. 그래야 여정을 출발할 수 있지요. 그런데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했어도 돌발상황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함께 가는 동료들 중 힘들어서 더 이상 무거운 짐을 질 수 없을 때 그를 버리고 갑니까? 아니죠. 돌아가며 함께 짐을 지고 부축하여 끝까지 갑니다. 

 

바로 이렇게 서로 짐을 나누어질 때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누립니다. 왜냐면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새 계명을 살아내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 안에서 서로 짐을 나누어 집시다. 우리가 각 지체의 짐을 함께 질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겁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겁니다.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제대로 된 집을 짓고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