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마태복음

October 24, 2021 말씀 스케치

John Han 2021. 10. 22. 22:28

마태복음 26장 17-30절

사도행전  2장 42절

 

1. 진정한 사랑에 대하여

 

저와 제 아내의 영화 취향은 다릅니다. 정말 다릅니다. 저는 영화 시작 후 10초 동안 사운드가 비어 있는 영화를 견디지 못합니다. 예전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액션 영화를 많이 보면서 더 그렇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영화관에 갈 때 일관 되게 사운드가 많은 영화를 골라서 택하는 저를 향해 '다른 영화'도 볼 수 있는 것 아니냐? 하는 항의를 했던 아내의 모습도 기억납니다. 

 

멜로 영화를 보면 아픔, 눈물, 배신, 위기, 결국엔 해피엔딩 혹은 비극적 결말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성경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호세아'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이 선지자로 택한 사람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바르고 신실한' 자였습니다. 

 

(어떻게 신실한 자인지 오늘날의 모습을 한 예로 설명?)

 

그러던 어느 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듣게 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고멜'이라는 창녀와 결혼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호 1:2)"

 

하나님께서 내린 명령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마도 각자 자신이 호세아라고 가정했을 때 굉장히 복잡한 마음과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선지자 잖아요. 그리스도인 이잖아요. 그런데 그만한 대접을 받아도 겨우 마음이 좋을까 말까 하는데 어떻게 그런 여자를 만나라고 명령할 수 있죠? 

 

하지만 호세 선지자는 순종하고 고멜을 찾아가 결혼 했습니다. 고멜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면 고멜은 변했을까? 아닙니다. 결혼 후에도 고멜은 이전의 생활 방식을 여전히 행했습니다. 호세아서 3장 2절에 보면 호세아 선지자가 아내를 노예시장에서 돈을 주고 다시 사와야 하는 끔찍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호세아 선지자를 비참하게 만들거나 수치심을 느끼게 하기 위해 고멜과 결혼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이스라엘 백성이 깨닫기를 바라시면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고멜과 결혼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영적으로 간음 하는 자입니다. 잘못된 우상을 섬기는 제단에 매 순간 우리의 시간, 물질, 삶을 허비합니다. 바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으시고 우리를 찾으십니다. 노예 시장에 가서 자신의 아내가 완전히 벌거벗은 채 사람들에게 조롱 당하며 입찰 당하고 있는 상황을 마주봐야 했던 호세아 선지자의 심정처럼, 하나님은 이 땅의 우리를 그렇게 보고 계십니다. 

 

찾으십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번만 이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약속하신 것을 끝까지 지키시고 아무데도 가지 않으시며 애매하게 사랑하지 않으시고 격렬하게 사랑하십니다. 이 이야기에서 또 하나 감동적인 것은 '내가 이렇게 사랑하니까, 너도 사랑해야지 순종해야지'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구애'하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은 아주 강력해서 강철판과 같은 우리의 마음을 뚫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움직이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아는 하나님은 사랑입니까?아니면 두려움 때문에 이 자리에 오십니까? 두려움도 순종하도록 하지만, 사랑으로 인한 순종은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인한 예배가 아니라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렵기 때문에' 드린 예배라면 하나님이 아닌 '두려움'을 예배하는 겁니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호세아 선지자가 고멜을 다시 언약 안으로 돌아오게끔 했던 것은 그저 더 큰 사랑과 은혜를 부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보다 품꾼이 되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언약보다 계약을 맺길 좋아한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계약이 아니라 언약에 근거 하고, 우리는 종이 아니라 자녀의 관계입니다. 

 

 

2. 성찬,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는 자리

 

본문의 상황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최후의 만찬'입니다. 유월절 저녁, 예수님은 제자들과 식사를 하셨습니다. 유월절에 식사를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며 예배하는 절기입니다. 

 

마찬가지로 보통 식사와 유월절 식사가 구별 되듯이 마지막 만찬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무언가를 알려주시기 위한 구별된 식사였습니다.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 주십니다. 잔을 가지고 감사 기도하시고 주십니다. 

 

이 식사의 자리를 통해 무엇을 깨닫길 원하셨을까? 빵 맛? 포도주 맛?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과 가지신 마지막 만찬은 십자가 사건 직전에 이뤄진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신 이유는 자기 자신을 주시기 위함 입니다. 바로 그것을 제자들에게 식사 자리에서 맛보여 주셨습니다. 

 

빵을 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라 말씀 하셨고, 잔을 드시고 축사하신 후 나눠 주시면서 '이것은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 새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언약'의 피입니다. 새로 갱신하는 계약의 피가 아니라 '새 언약'의 피입니다. 노예 시장에 있는 아내를 다시 결혼이라는 언약 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돈을 가지고 가서 값을 치루는 호세아의 모습처럼, 

 

죄의 노예로 조롱 당하고 있는 우리를 하나님 자신의 약속, 즉 언약에 따라 독생자로 값을 치루고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고 자녀삼아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노력이 조금도 있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만 있습니다. 

 

성찬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 사랑을 맛보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기억' 하는 자리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성찬을 행하며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이 오늘날 내 삶 속에서 경험 되어지도록 힘써 지키는 겁니다. 

 

내 삶에서 어떤 경험이요? 마태복음 26장 28절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잔을 나눌 때 '죄 사함'에 대해 기억하게 해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값을 치루신 사랑처럼 서로를 용서하는 경험이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성찬은 우리가 누구인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들인지 기억하게 해줍니다.

 

 

3.  초대교회의 식탁

 

이렇게 '함께 식탁 교제'를 가지는 것은 서로 사랑하고 사랑으로 세워나가는 공동체라는 것을 '확인'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 살펴봤던 '예루살렘 교회' 뿐 아니라 당시의 모든 교회에 행해졌던 것이 '식탁'이었습니다. 

 

그 시간에 예배가 있었고 찬양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먹는 것에 의의를 둔 것이 아니라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마라나타의 식탁 교제였습니다. 이 땅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긴장감 속에서 밖으로는 세속 가치관으로부터 오는 압박을 견녀내야 했지만, 안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기 위한 교제와 훈련이 지속 되었고 끈끈하게 결속 되었습니다. 

 

세속과 교회 공동체의 긴장감; 고린도교회의 잘못된 식탁

 

당시 세속 기준은 식사를 하기 위해 앉는 좌석의 배치도 달랐고 먹는 메뉴의 내용도 달랐습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식탁 교제는 달라야 했는데 고린도 교회는 세속 기준에 따라 만찬을 나눴습니다. 

 

각자 자기 음식을 가지고 와서 먼저 먹고 나중에 온 사람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야 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노동을 하지 않았기에 대체적으로 부유했던 사람들이었고, 나중에 온 사람들은 주로 노예,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제때 식사 시간을 맞출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식탁의 모습이 아니라고 바울은 단호하게 질책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오히려 넉넉하게 베푸는 공동체가 되기를 힘썼습니다. 성찬은 모든 사람이 충분히 먹고 마시고 있는지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아내 고멜을 데려오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애타게 구애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내어 주어 값을 치루고 우리를 사신 것처럼, 그 본질이 식탁에 녹여져 담겨 있기를 힘썼다는 거에요.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라(행 2:42)"

 

교회 공동체에서 먼저 기도, 예배에 힘쓰고 남는 시간에 교제하고 떡을 떼야 하는 것 아닌가? 그만큼 식탁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처음 방문하거나 아직 어색할 수도 있는 공동체 성도들이 서로 식탁 교제를 나누면서 얼굴을 익히고 이름을 불러가며 친숙해지고 함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야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야 '하나님의 끈질긴 구애를 값없이 받은 존귀한 자'야 너~무 감격스럽지 않아? 정체성을 서로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성령 안에서 교제가 이뤄졌고 자연스럽게 예배가 행해졌습니다. 한 마음으로 뭉쳐진 하나님의 권속들이 드리는 예배는 어땠을지 상상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통해 자신이 살과 피를 내어주듯 이 사랑에 함께 하기를 말씀하셨던 것처럼 초대 교회 공동체는 예배 처소 뿐 아니라 각자 자신들의 집에서도 모여서도 함께 하기를 힘썼습니다. 함께 삶을 살아갔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그 사랑의 본질을 삶에서 녹여내길 원합니다. 특히 모두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지만,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가 가지는 식탁 교제에서 드러내길 소망합니다.

 

(마무리 보충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