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마가복음

December 19, 2021 말씀 스케치 (2)

John Han 2021. 12. 18. 13:38

1. 제자도, (반복 된) 가르침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내용은 모두 역설적이다. 죽음을 통해 얻는 생명, 약함을 통해 승리를 얻는 강한 능력 등 당시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원리와 맞지 않는 가치관들이다. 

 

본문은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동일한 패턴이 있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이 앞으로 겪게 될 고난(죽음)에 대해 예언 하신다. 그 후엔 제자들의 교만, 이기심에서 나온 어떤 행동이나 말들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참 제자의 역할에 대해 가르치시며 마무리 된다. 

 

본문 막 9:30c-31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자,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리를 향한 것이 아니라 열두 제자를 향해 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목적지까지 가기 전, 십자가 사건을 대비하기 위해 준비하신다. 예수님의 사역이 무리를 향한 가르침과 기적에서 열두 제자를 위한 가르침으로 바뀌었다. 

 

"가르치시며" 헬라어 시제를 살펴보면 '반복의 미완료'로 쓰였다. 이것은 한 번 가르침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 된 주제'였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나눴던 제자도에 대해 예수님은 반복적으로 가르치셨다. 

 

지난 주 예로 들었던 군인, 운동선수는 사도 바울이 서신서를 기록할 때 언급 했던 예화들이다. 동일하게 예수님의 반복된 가르침을 묵상하며 다시 떠올랐다. 

 

우리는 어떤 것을 새롭게 시작하거나 배우거나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분야에서 숙련된 스킬을 위해 단련한다. 한 번, 두 번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잘 안다. 

 

또한 '교회'로 모인 우리의 우선 된 목적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반복된 가르침은 어디서나 들을 수 없다. '교회'로 모인 곳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나누고 듣고 수정할 부분이 있다면 궤도를 바꿔서 단련할 수 있다. 

 

2. 반복된 가르침 (1) 섬김, 희생

 

예수님은 제자도에 대한 두 번째 반복된 가르침에서 가정 먼저 섬김, 희생에 대해 말씀 하신다. 

 

본문을 계속해서 살펴보면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넘겨져"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던' 행동,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행동,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준 행동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넘겨져'는 하나님의 목적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죄에 대한 희생제물로 '넘겨주'셨다. 이것이 유다, 종교 지도자, 빌라도의 손에 의해 넘겨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내어 주셨다'는 것이다(롬 4:25; 8:32; 고전 11:23; 갈 2:20).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도 동일한 개념을 말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너희에게 '내준 바' 되었다고 말한다(행 2:23; 3:18). 이사야 53장 6절 말씀을 보면 자신의 아들을 고난과 죽음에 내어주시는 하나님에 행동에 대해 언급한다.

 

이 개념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의 영역이다. 아니, 신이 무엇이 부족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을 하는 것인가? 우리는 늘 신을 달래야 하고, 윗 사람을 맞춰줘야 하고, 기분과 감정의 눈치를 봐야 하고, 그러한 문화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넘겨주심'에 대한 섬김에 대해 100%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믿고 있다. 

 

본문 9:33-34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누가 크냐는 논쟁은 당시 1세기 명예/수치의 문화에서는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확증하기 위해 자랑하는 것이 필요한 일로 여겨졌다. 명예/수치를 중요시 하는 문화권 안에 살고 있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달라고 구하고 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섬김, 희생'에 대해 말씀 하신다. 막 9:35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반복된 가르침이 등장한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끝'이라는 지위는 '뭇 사람을 섬기는 자'로 규정 된다. 

 

'섬기는 자'라는 말은 윗사람의 대행자로서 혹은 윗사람의 명령에 따라 섬기는 사람을 말한다. 이에 대한 최고의 본보기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10:45). 

 

명예/수치를 중요시 여기고 엄격한 사회적 구분과 계급제도가 있는 당시 문화적 맥락에서 이러한 '섬김, 희생'에 대한 가르침은 충격적인 것을 넘어서서 "반문화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와닿는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돈을 쌓아 축적해 나가라는 복리의 자본주의 맥락에서 가진 것마다 나눠주고 베풀라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처럼..(저축과 노후 대비가 '악'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말하는 게 아니다, 어떤 맥락에서 말하는 것인지 잘 이해 하기를..)

 

예수님은 자신이 '넘겨질' 것에 대해 말하고, 끝자리로 가는 섬김과 희생에 대해 가르치시며 하나의 예로 '어린아이'를 말씀 하신다. '어린아이'는 순진, 순수, 유순한 존재로서 거의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다. 전혀 관계 없는 사람도 지나가다가 '어린아이'를 보면 웃는다. 말도 걸어본다. 

 

그러나 당시 1세기 문화에서 아이들은 하찮고 아무런 사회적 지위가 없는 존재로 취급 받았다. 예수님이 '어린 아이' 영접한다 라고 말씀 하셨을 때는 문화적 맥락을 깨고, 하찮고 낮은 지위의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낮추라는 의미다. 좀 더 레디컬한 의미로는 그로 인해 자신이 가진 명예를 잃을지라도 행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보다 더 높은 지위와 권위와 명예를 가진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대중미디어 이면에 담겨져 있는 가치(value)도 그러한 것들을 보여주고 말한다. 오랜 사역의 경험으로 교회 현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어딜가든 '의전'하는 역할을 도맡아 진행 했다. 

 

게스트가 누구든 이동 수단, 출발/도착 시간, 식사 여부, 좋아하는 음식, 필요한 물건, 선호하는 간식, 숙소 상태 점검, 추가적으로 불편한 부분은 없는지 떠나는 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살폈다. 물론 이런 표현은 조금 웃기지만 교회라는 생태계 안에서 지위나 명예가 높았던 분들이다.

 

그러나 어느 날 사역을 멈추게 됐던 계기는 진짜 '섬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서 부터 그랬다.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옳은 것일까? 잘 가고 있는 것일까? 생각했을 때 자신이 없었다. 뭔가 어긋난 기분이 들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반복적으로 가르치신 '섬김/희생'의 말씀과 다른 점 때문인 것 같다. 

 

문화적 맥락을 깨는 섬김, 희생. 가장 작고 가장 덜 중요한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한다. 그 사람들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왕이 보낸 사신) 혹은 예수님을 보낸 분(하나님, 왕)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데 있어서 '기도'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방향과 우리의 방향이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자리로 인도 하신다. 그러나 그 자리는 가장 첫째 되는 자리라는 역설적인 인도하심이다. 

 

3. 반복된 가르침 (2) 교만, 당파심, 경쟁심

 

예수님의 첫 번째 가르침 이후에 요한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막 9: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명예를 갈망하고 독차지 하려는 경쟁은 사회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요한과 다른 제자들은 그들 안에서 지위와 권세를 얻기를 갈망 했다. 그래서 무명의 축사자를 잠잠하게 하려 했다고 말한다. 

 

이 무명의 축사자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런데 말씀은 보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다 기록 되어 있다. 이 말은 '주님의 권능에 의해' 행해진다는 의미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일어난다는 의미는 아주 중요하다. 그 무명자가 누구인지 이름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열두 제자 무리 안에 있지 않더라도 참 그리스도인이 존재 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이나 어떤 잘못된 의식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사역하고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요한의 말은 그의 안에 있는 '이기심, 경쟁심'을 나타낸다.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그 사람을 반대했다고 말한다. '주님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무명자는 12 제자 안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자도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어떤 무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충성하는 것이 제자도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40절)" 이 말씀은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각 개별 교회, 공동체 더 넓게는 교단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 더 존귀한 무언가에 이끌려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 중심' '교단 중심' '당파 중심' '어떤 의미로 하나가 되게 하는 신념이나 가치관이 맞는 사람들 중심'으로 모여든다. 

 

이로 인해 안타깝지만, 기독교공동체에서 경쟁심, 이기심, 질투심, 당파 짓는 행위들이 참 많이 드러난다. 지나간 일들에 후회는 별로 없는 데 한 가지 꼽자면, 왜 그렇게 모 대학원에 입학 하기를 애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학원 출신이 아니면, 사역 하는 것도 심지어 해외 선교지에 가서도 푸대접을 받아서 꾸역꾸역 준비해서 입학 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지금 제도권 밖에 나와 있지 않는가? 

 

경쟁심, 이기심, 당파 짓기는 사람을 미워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감정과 인격에도 위험하지만 그로 인해 오직 자신들만의 세계에만 갇혀서 행동한다는 점에서 더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한 발자국만 물러나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그것 아니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져서 어떻게 해서든 그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증에 발버둥 쳤던 과거를 돌이켜 보면 시간을 많이 낭비한 것 같아 스스로 안타깝게 여겨 졌다. 

 

빌립보서 1장 15-18절 말씀은 보면 바울은 로마에서 가택 연금 상태로 갇혀 있는 상태다. 자가격리를 해봐서 알지만, 너무나 답답하고 힘들지 않은가? 밖에 제대로 나가지 못하는 상황도 답답하지 않은가? 바울은 그렇게 약 2년간 지냈다. 그런데 바울을 경쟁자로 생각했던 다른 사역자들이 바울이 갇혀 있는 틈을 타서 괴롭게 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의 놀라운 고백. 그 경쟁자들의 성공을 기뻐한다고 서신서에 기록한다. 자신의 영향력이나 성공이 축소 되는 것보다 오히려 복음 전파가 이뤄지는 것에 대해서만 압도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마냥 인격적으로 착해서 이런 고백이 나올 수는 없다. 바울에 대해 알지 않는가? 바울은 무서운 사람이다.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고백은 성령께서 반복된 가르침을 주셨으리라 본다. 마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반복된 가르침을 하셨던 것처럼, 승천 이후에 성령이 임했으니 성령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끊임없이 이 원리에 대해 말씀하시고 가르쳐 주셨을 것이다. 

 

비록 바울은 가택 연금 상태로 갇혀서 행동에는 자유가 없는 것처럼 보이나, 오히려 유대교 시절 자유롭게 몸을 움직여 종교적 열심으로 행했던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참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확신한다. 우리에게 이러한 고백과 실제 삶이 있기를 소망한다.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넘어지게 하는 자들일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우리 삶에서 어떤 것이든 기꺼이 희생하는 삶이기를 바란다. 

 

바울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서 

 

4. 반복된 가르침 (3) 그래서 공동체다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을 것(49절)'이란 말씀은 아마도 모든 그리스도인이 시련과 박해에 직면 하리라는 의미다(딤후 3:12). 이런 상황에서 시련에 굴복하거나 영적 가치관을 타협하지 말고, 시련을 인내로 인내를 영적 성숙으로 발판 삼아 성장하라고 말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막 9:49-50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이 말씀은 "서로 화목하라"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교제와 하나 됨을 경험하라는 것이다(소금을 공유한다는 것은 함께 식사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 된다는 것은 신약 곳곳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다. 바울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라고 명한다(고전 1:19, 엡 4:3, 빌 2:1-4). 

 

교회는 분열할 때 힘을 잃는다. 마치 맛을 잃은 소금처럼 영향력을 잃어 버린다. 교회 공동체 내에 가장 작은 자가 있는가? 더 섬기고 희생해야 한다. 교회 안에 교만, 경쟁, 이기심이 싹트고 있는가? 어떻게든 뿌리를 뽑아내야 한다. 

 

제자도는 이렇게 함께 할 때 성령의 능력으로 온전해질 수 있다.